식상하게 들리겠지만 산다는 건 결국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군가를 고민하는 일 아닐까? 들은 얘긴데, 문과는 나는 ‘누구’냐고 묻고 이과는 나는 ‘무엇’일까라고 질문한다더라. 그런 속설이 맞는지 나 역시 줄곧 ‘누구’인가를 물어왔더라. 답을 얻었냐고? 그럴리가. 살아 있는 동안 질문은 지속되겠지만 지금까지의 결론은 여전히 모른다이지. 아직 시간이 남아 있지만 결국 삶은 답을 얻지 못하는 질문의 과정이지 싶어.
침침한 눈으로 책을 뒤지고, 환갑이 다 돼 세례를 받은 것도 답은 없지만 질문을 멈출 순 없어서였어. 아무리 과학이 진보했다지만 내가 생명이 되기 전과 죽음 이후를 도무지 설명할 수 없잖니. 간혹 왜 뒤늦게 신앙을 가졌느냐는 질문을 받곤 해. 믿음이란 지극히 개인적 차원의 체험이라 온전히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어느 누구한테도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해. 내가 선교나 포교를 이해 못하는 이유야. 나와 다른 길을 걷는 사람에게 내가 설정값을 입력한 내비게이션을 따르라고 할 수 없는 노릇이잖아.
앞으로 어떻게 업데이트될지 모르겠지만 난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갈지에 대해 지금까지 정리된 생각은 이런 거야. 나란 생명체는 원자 상태로 존재하다가 확률을 따질 수 없는 우연의 결과로 인체가 되었고, 다시 원자 상태로 돌아가서 흩어지게 될 거란 거지. 이런 잠정적 결론을 얻은 뒤로 죽음의 공포로부터 아주 조금은 자유로워졌어. 고백하건대 50대에 접어들면서 극심한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지. 심약한 기질과 갱년기가 겹쳤던 모양이야. 혹시 당신에게도 비슷한 시기가 오거나 번아웃이 오거든 주저 말고 자발적 치료를 받았으면 해. 누구의 권유 없이 정신과 문을 스스로 연 건 내가 취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거든.
최근 에이징커브가 왔어. 확연하게 체력도 기억력도 떨어졌거든. 15년을 함께 살아준 포동이가 얼마전 종양 진단을 받았어. 녀석도 에이징커브가 왔었던 모양이야. 수술을 위해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그저 눈물만 흐르더라. 내일부터 수술과 항암 치료로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되겠지. 고령이라 언젠간 떠나리라 예감했지만 마음의 준비가 충분하지 않았나 봐. 때가 이르러 떠난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 상태로 돌아간 포동이가 아직 떠나지 않은 내 곁에 머물 거라 생각하기로 했어.
오랜만에 당신과 저녁식사를 하다가 ‘존경’에 대해 얘기했지? 당신은 존경할 만한 사람이 없다고 했고, 나 역시 동의했어. 멀리서는 존경스럽게 보이던 사람이 가까이 가면 안 그렇거든. 인터뷰어로 이른바 성공했다는 사람들을 여럿 만났지만 공통적으로 느낀 게 있어. 그들 대개가 자신들의 성취가 오롯이 자신의 역량 때문이라고만 생각한다는 거야. 성취의 핵심이 그들의 개인기였다고 쳐도 수많은 조력자들의 협조와 희생 없이 과연 가능했을까?
‘운칠기삼’이란 말이 있지. 결정적 순간, 이런저런 운이 작동하지 않았다면 과연 성공의 무거운 문이 그들에게 열렸을까? 그렇다고 요행을 바라고, 운에 기대라는 말은 아니야. 눈에 보이지 않는 자연의 순리에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지. 롱텀으로 보면, 순식간에 왔다가는 한 인간의 성공이 뭐 그리 대단하겠어. 더군다나 성공은 자신과 주변의 일거수일투족이 알려진 극도로 불편한 삶을 동반해. 그들을 존경하기 힘들 듯이 ‘나’ 역시 유명세를 타면 그런 평가의 대상이 됨을 감수해야 하지. 그러니 평범한 일상에 만족하며 무탈한 삶을 사는 당신이 되었으면 해. 루저의 변명처럼 들리겠지만 사는 거 거기서 거기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