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몸엣가시를 갖고 살지. 세상 멀쩡해 보여도 어느 한 구석, 손 쓸 수 없는 곳이 있거든. 몸만 그렇겠어? 마음에도 콕 박혀 빠지지 않는 망할 놈의 ‘가시‘ 같은 것이 있지. 나도 그렇고, 당신인들 그런 게 왜 없겠어. 아비로서 당신의 깊은 아픔을 당신만큼 모르니, 멀찍이서 바라볼밖에. 솔직히 나의 방관은 상처의 원인 제공자가 높은 확률로 나일 수 있기 때문이겠지. 윤리가 아닌 법적 관점에서 보면, 천륜은 가해와 피해의 직접 당사자들이라고 생각해. 핏줄로 얽힌 사람들의 사랑은 사실 은폐인 거지. 지독히, 드러내놓고 사랑하지 않으면, 가해와 피해의 단서가 확연히 드러나니까.
당신의 마음가시를 콕 집어 헤아릴 수 없으니, 나는 어떤지 말하는 것으로 대신할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음가시는 극복이나 치유의 대상이 아닌 것 같아. 애쓸수록 빠지기는커녕 더 깊이 파고들어, 마음 어딘가를 돌아다니다 불쑥, “이젠 아프지 않아?”라고 묻더라. 넌덜머리가 나서 한때는 발버둥도 쳤지만 소용없었어. 언제, 어떻게 그러기 시작했는지 기억에 없지만 굳은살쯤으로 여기게 됐나 봐. 뭘 깨달아서는 아니야. 그렇게 마음먹는 것이 덜 아프다고 본능적으로 판단한 것 같아. 지금은 덜 아프냐고? 치유도 극복도 못했는데 괜찮을 리 없지. 그 고통까지 포함해야 내 존재가 완성된다고 여기기로 했어. 가해자일 개연성이 큰 내가 피해자인 당신더러 “나도 아팠고, 이러저러하니 덜 아프더라”라고 말하려니 민망하네. 철 덜 든 아비의 넋두리, 변명쯤으로 받아 주시게.
“주말에 시간 어때?”라고 전화기만 만지작 거리다 통화버튼을 누르지 않은 적이 많아. 가정을 꾸린 아들의 신혼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야. 앞으로 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늙은 아비의 조급함보다 이젠 누군가의 남편이란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서지. 이렇게 조금씩 멀어지는 연습을 해야, 덜컥 헤어지는 날 오면 덜 서운할 거야. 가끔, 당신과 작별하는 날, 말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뭐라 할까를 생각할 때가 있어. 아주 건조하게 문장을 다듬다가 “잘 놀아”라고 정리했어. “잘 놀다 오렴”은 내가 가 있는 곳으로 오란 소린데, 내가 갈 데가 어딘지 몰라 오라는 말은 못 하겠더라. 사는 건 노는 거야. 그저 ‘잘‘ 놀라고 할밖에. 뚱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놀지, 들떠 오늘의 소풍을 즐길지는 자신이 결정하는 거지. 궂은날도, 울퉁불퉁 험한 길도 있을 거야. 그럴수록 발바닥으로 땅을 움켜쥐고 호기심 어린 눈으로 여기저기 둘러보며 재미있게 노시게. 먼저 놀아 본 아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