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서는 그랬어. 책 한 권 달랑 읽고, 마치 세상사 미로에서 벗어난 것처럼 굴었지. 제대로 읽은 것이었는지도, 글쎄. 일역본을 중역한 다이제스트본을 읽고는 고전을 탐독했다고 착각하던 시대였고, 나도 그랬어. 다만 두터운 사전 뒤져 몰랐던 단어 하나 겨우 찾던 시절이니, 수고롭긴 했지. 과정이 고단해서인지, 간편 검색, LLM과의 대화와는 기억이 지워지는 속도가 달라서 어떤 단어는 그 과정이 지금도 생생해. 단순한 앎에도 각인의 정도가 다른 거지. 불투명한 미래가 두려웠던 젊은 나는 허세와 허영으로 ‘확신의 외투’를 입고 싶었나 봐. 이과의 뇌를 가졌다면, 작은 기계라도 발명했을 텐데 문과인 나는 세상의 이득과는 무관하게, 신세만 지고 산 셈이야.
문과 출신이 성공하는 유일한 길은 창업이 아니라 교주가 되는 거라는데, 그럴 걸 그랬나, 후회되네. 늙은 나는 요즘, 확신의 외투를 벗기 위해 애쓰고 있어. 내가 습득한 모든 정보는 제한적이고 그걸 바탕으로 구성된 확신은 너무 부서지기 쉬워. 손톱만 한 유리 파편을 들고, 이건 꽃병이다, 아니다 창문이야라고 고함치고 있는 꼴이지. 아무리 정보를 수정하고, 논법을 바꾼 들 확신에 차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현실만 자각하게 돼. 판단을 유보하거나 자기 확신을 회피하라는 말은 아니고, 언제든 수정할 수 있게 열려 있어야 한다는 거지.
미용만 하면 강아지들이 한 이틀, 시름시름 앓더라. 낯선 환경과 소음 같은 스트레스에 노출돼서라고 생각했어. 어제 어떤 글을 보니, “외부의 충격을 완화해 주고, 다른 강아지들에게 물렸을 때 상처를 방지하는 털이 없어져서 당황하고 수치스러워일 수 있다”라고 하더라. ‘당황‘과 ‘수치‘라는 단어를 보고, 난 왜 아이들의 ‘심리적 요인’은 고려하지 않았는지를 탓했어. 언어로 소통할 수 없는 대상과의 동거는 늘 나의 부족함을 확인시켜. 어디 강아지뿐이겠어? 난, 제한된 정보로 교감해야 하는 당신을 비롯한 모든 타자를 유리창 밖에서 보고 있으니까. 갑갑증이 도지네.
강아지들을 번갈아 짧게 산책시키고 나서, 끼니도 챙길 겸 들러 이 편지를 쓰는 동네 빵집 얘기했지? 그 집 아들에게 오래된 수동카메라를 빌려줬더니, 가방을 돌려주며 필름 한 롤을 넣어놨더라. 가깝고 멀고를 떠나, 늘 작은 선물을 주고받으면 일상에 작은 파동이 만들어져. 선도 좋은 채소나 과일은 좀 넉넉히 사서, 아랫집 문고리에 걸어두고 “불편을 드린 것 있으면 양해하시라”라고 손 편지 한 장 남기면 좋잖아?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은 결코 전달되지 않아. 절대 알아낼 수 없는 세상의 작동 원리 따위의 담론보다, 유치원에서 배운 것들을 새삼 깨달을 때가 더 만족스러운 아침이야. 그대, 기념할 일 없는 오늘, 아내에게 꽃다발을 안겨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