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다닥 해치울 일이 없으면, 지척의 물가로 가지. 섬사람의 특권이야. 낡은 자전거로 애써 땀을 내지 않아도, 수시로 들고 나는 바다의 육중한 관능을 목격할 때의 쾌감이란. 동해처럼 시퍼렇지도 파도의 포말이 눈부시지도 않은 서해. 옅은 바람이 서해를 말아 쥐고 흔드는 장면은 드라마틱하지 않아서 좋아. 밥 먹으며 틀어놓은 예능 프로그램처럼 시선을 강탈하지 않아서. 어디선가 바삐 흘러든 물이 바다에 당도해 강의 속성을 잊는 순간, 죽음도 그러하겠지라고 생각했어. 죽음은 마땅한 과정이고, 나 아닌 이들에게 살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라고 생각해. 일본인들은 부모 자식이 모인 자리에서 부모 중 한 분이 돌아가시면 어떻게 살 건가를 두고 상의한다고 해. 가족의 죽음을 입에 올리길 꺼리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문화지. 난, 죽음을 단절이 아니라 과정이라고 여기는, 남은 자들의 삶의 방식을 함께 고민하는 그들의 인식에 동의하고 싶어.
어린 당신의 검은 머릿단을 쓰다듬던 계절이 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어. 겨울이었으려나. 길항의 긴장은 바다에만 있는 것도 아니더라. 이 섬에 솥단지만 한 산이 있어. 녹음으로 검푸렀던 산이 겨울이면 쇠잔해졌다가 다시 돌아가기를 반복하지. 한 번은 그 산 밑 그늘을 걷다, 기회가 된다면 준수하게 생긴 짐승으로 태어나 저 산에서 늠름하게 살아도 좋겠다 싶었어. 아직 볕은 따가워도, 이불 말고 잠에서 깨는 걸 보면, 계절이 바뀌나 봐. 발바닥 간질거리는 봄은 불현듯 찾아오고, 가을은 뒷목으로 오곤 하지. 곤죽이 되어 퇴근과 출근이 반복돼도 계절의 오감은 놓치지 마시게. 최소한 1년을 4번, 다른 감성으로 살 수 있잖아? 당신에게 36번째 가을이 그렇게 오고 있어.
툭툭 찍어 두었던 사진 정리에 며칠 고생했고, 더 그래야 할 판이야. 어떤 컷은 지금보다 낫고, 고만고만하지만 대부분은 형편없더라. 눈은 높아져도 실력은 제자리거나 퇴보한 거지. 실망하진 않아. 안목이라도 높아졌다면 그게 어디야. 한자에도 조예가 깊고 문장도 놓았던, 글씨까지 달필이었던 선배가 있었어. 초짜였던 난 휴지통에 있던 선배의 원고를 몰래 가져다, 필사를 하곤 했어. 그에게 평론 데뷔를 권하자 그는, 우리 문학사는 뛰어난 평론가보다 삼류 소설가를 기록할 거라며 "난 고급 독자로 만족할 거야"라고 했지. 창작의 굴레에 갇히지 않고 높은 안목의 소비자로 남겠다던 선배의 말을 이제야 알 듯 해. 누가 나더러 어찌 살았누,라고 물으면 뭐라 답하지를 한동안 고민했어. "신파였고, 삼류였다", 이 한 마디면 되지 않을까? 다만 적당한 안목을 가진 소비자로 살았음은 후회하지 않아. 이 정도면 됐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