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인의 불안, 그림자와의 대면
태초에 이 '불안'이 있었다.
태초에 '이불' 안이 있었다.
※ 몽롱 주의 ※
※ 비구름 주의 ※
잦은 아침, 나의 이불 속에는 불안이 있다. 어쩌면 세계의 근원일지도 모를 이 불안은 지나치게 내밀한 공간인 이불 속에서 지나치게 사적인 문제들로 새로이 잉태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불안(이불 안)을 거두고 침대에서 일어나기 직전까지 나를 짓누르는 모든 감정과 생각들을 가감 없이 담기로 했다.
——
어제였던가. 그제였던가. 악몽을 꾸고 울면서 깼다.
악몽을 꾼다 해도 그런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은데, 애처롭게 무어라 호소하면서 깼다. 깬 직후까지만 해도 그 말들은 생생하게 입가를 머물렀다.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후부터는 잊었다. 수치스러웠던 것 같다.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들은 참 신기하다. 지옥에서 바로 천국으로 바뀌기도 한다. 최근 새집으로의 이사가 나에게는 그런 의미였다. 하지만 깊은 무의식의 세계는 다르다. 한 번 금이 가면 자국이 남는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참 섬세하다. 아무리 쿨한 척해도, 관계를 단절한다 해도,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섬세하다는 것은 유약함에서 시작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옛날 옛적 고대인들은 대자연 앞에서, 하늘을 날고 바다를 유영하고 날카로운 뿔과 송곳니를 가진 동물들과 비교해서 스스로가 얼마나 나약하고 초라하게 느껴졌을까. 유약함이 섬세함이 되기까지 그들은 매일매일을 불안과 사투를 벌이며 자신을 단련시키고, 사람을 모아 단합하고, 부단히 기술과 사회를 발전시켜 왔을 것이다. '이불안의심연'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자주 그들의 정신을 아침 영양제처럼 삼킨다. 아, 그냥 삼키진 않고 꼭꼭 씹어서.
그럼 정말 강한 건 어떤 것일까. 대면하는 것이다. 불안에 잠식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대면하는 것이다. 자신의 근원적인 나약함과 열등함, 초라함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면하지 않는 사람들 때문에 나는 많이도 아팠고, 아직까지도 원치 않게 사투를 벌여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서 겁 많고 회피하는 나의 숨겨진 일부를 발견했고, 삶의 귀중한 교훈을 얻었다. 어쩌면 그들은 융이 말하는 '그림자' 같은 존재로 내 안에 남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아가 아름다운 이상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외면하고야 마는 정신의 불순물 같은 그림자. 내 그림자를 착실하게 돌보지 않으면 자신은 물론 또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할 수도 있다. 그림자를 책임진다는 것은 매우 두렵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충분히 가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사월에 꽃마리 피다.』를 출간하고 난 이후로는 이런 내밀한 내용의 글들도 될 수 있는 한, 공개된 자리에 올리려고 애쓰는 중이다. 조금씩 덜 애쓰고 습관화되는 것이 느껴진다. 이 정도의 내밀한 감정들이라면, 전에는 『사월에 꽃마리 피다.』를 구성하기도 했던 노트북의 '글 조각' 파일에 차곡차곡 저장하곤 했다. 지금은 더 이상 쓰지 않는 파일이 됐다. 그 점이 뿌듯한 성장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혼자만 보는 곳에 끄적이는 대신 여러 플랫폼에 다양하게 글을 올리고 있으니까. 이제는 한 명의 글쓰는 인간으로서 지속적으로 선언하고, 세상에 다가가기를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글은 숨기고 회피하며 선을 긋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드러내고 과단하게 표출하고 사람에 더욱 가까워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
그럼, 더 무거워지기 전에 여기까지.
오늘은 이만하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