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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꽃피 Feb 20. 2023

아무르

마침 그런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사랑에 대한.



지난주 내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었다. 책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는 고딕 공포 소설 단편집 『유령 이야기』를 읽었다. 그 다음, 얼마 남지 않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몇 장의 독서를 마무리했다. 영화도 많이 봤다. 상실로 인한 불안을 깊게 파고드는 올리비에 아사야스의 <퍼스널 쇼퍼 Personal Shopper>와 <클라우즈 오브 실스마리아 Clouds of Sils Maria>. '조동필'의 유머러스하고 스릴 넘치는 <어스 US>와 <놉 Nope>, 청각을 뛰어넘는 음악을 노래하는 영화 <코다 CODA>. 일요일의 마지막에는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아무르 Amour>.



다른 예술 작품들에 기대야만 했다. 글을 쓸 힘이 없었다. 글을 쓰는 사람인데 글을 쓸 힘이 없었다니, 핑계를 댈 정도로 무능력하다고도 할 수 있고, 에라 모르겠다, 더 무식하고 단순하게 나가서는 글을 쓰기가 싫었다고 할 수도 있다. 어떤 표현으로 설명이 되든, 어쩔 수 없다. 글을 쓸 힘이 없었다. 그게 사실이었다.



우습게도 고집부리는 힘은 남아 있다. 그런 모습까지 나의 일부로 인정할 자신이 없어서 저항한다. 글을 쓰기 위한 '인풋'과 '재충전'의 시간이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중요한 것으로부터의 도피. 대면과 직접적인 말들로부터의 도주. 이런 것이 예술과 가까이하는 자들의 '고귀한' 시간, 그 이면이나 실체일지도 모른다.



어떤 해석과 평가를 하든, 특정 행위의 효과는 어떻게든 남는다. 전에 영화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을 인터뷰하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영화가[예술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런 질문이 있었다. 대부분 아닐 것 같다고 대답했다. 얼핏, 영화 일을 하면서도 영화의 위력에 대한 그런 굳건한 믿음 정도도 없나 생각할 수 있지만, 현실에 온몸을 부딪쳐 가며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기에 나올 수 있는 대답이다. 이해된다. 그렇지만, '세상'까지는 모르겠지만, 예술은 적어도 나를 바꿨다. 지금도 바꾼다. 적어도 그런 믿음이 나를 쓰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살게 한다. 실제로 바꾸는지 아닌지보다도 그런 사실이 중요하다. 행위의 효과. 믿음의 효과.



지난주를 열어 준 『직업으로서의 소설가』가 그랬고, 상대적으로 좀 더 가볍게 즐기긴 했지만, 그 이후의 작품들이 그랬다. 그리고 그 주에 마침표를 찍은 <아무르>가 그랬다. 나를 바꿨다. 아주 조금씩일지라도. 감상의 순간에만 굵게 물결쳤다가 반짝 그치는 변화처럼 보일지라도. 그들로부터 온 믿음의 효과가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로 하여금 쓰게 한다.    







치매에 걸린 부인을 보살피는 노인의 이야기. 묵묵히 지켜보다가, 문득 이 영화의 제목이 '아무르(Amour)', '사랑'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였던 것 같다. 마침 그런 생각을 하던 시기였다. 사랑에 대한.



2023. 2. 13.


내가 가려는 길.

욕망에서 사랑으로 나아가는지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이 나든, 글이든, 사람이든, 삶이든. 사랑으로 나아간다고 느꼈다. 미숙한 내가 지금까지 사랑이라고 느낀 것은 더 자세하게는, 대상에 대한 욕망이거나 '사랑에 대한 욕망'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기회라는 이름으로 주어질 때, 그것은 더 사랑답게 사랑할 수 있는 기회이자, 나에게 삶이 주는 사랑 그 자체로 느껴진다. 사랑에 대한 감은 있지만, 사랑하는 법을 온전히 모르고 태어난 나에게. 그렇게 자라난 나에게, 삶이 주는 기회로서의 시간. 결여되어 있는 만큼 나는 더욱 절실히 시간에 매달린다. 사랑하기 위해. 더 잘 사랑하고, 사랑을 온전히, 깊숙이 느끼기 위해.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으면서는 매초를 알알이, 찬찬히 활자로 느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앞으로의 삶을 독자로서, 작가로서 섬세하게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알지만. 감은 있지만. 결여된 내가 한 대상을 사랑의 시선으로 '일관되게, 지속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일이든 사람이든, 인간 사회에서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은 자발적인 의지를 기초로 한 일관성과 지속성에 있다. 그것은 사랑의 속성이기도 하다. 온전히 받아 본 적은 없어도(있을 수도. 줬는데 고집부려서 안 받았을 수도.) 감은 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불완전하기는 해도 사랑을 향해 나아간다. 그것을 너무도 원하는데, 나는 자꾸만 넘어진다. 삶은 긴 리듬이라는 것을 아는데. 어그러진다. 사랑은 단단한 결속인데, 단절되고야 만다. 쭉 이어져야 하는데 뚝뚝 끊긴다. 글이든 사람이든.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누군가의 확언 같은 것이. 괜찮다는 위안으로 내 삶의 울퉁불퉁한 단절들이 부드럽게 연결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 있을 테니까. 사실은 살아 보고 사랑하고 싶으니까. 그런 기적을 바랐던 것 같다. 아무르. 문득 이 영화의 제목이 '아무르(Amour)', '사랑'이라는 것을 떠올리게 되었을 때. 영화가 그런 말을 나에게 건넸다. '괜찮다'. 영화의 언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이미 충분히 알고 있듯이, 그 방식은 결코 직접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다. 기적 같이. 그래도 사랑은 거기에 있어. 소중한 기억을 조각난 단어들로 게워 낸 안느의 텅 빈 눈동자 속에도. 움직일 수 없는 주름진 다리와 그 사이로 오줌이 흐르는 것을 배우자에게 드러내야만 하는 지극한 수치심, 그것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아야 하는 시선, 숨을 조이는 베개가 소리치는 절망적인 이별에도. 사랑이 있다.



그리고 마음껏 쏟아 내도 돼. 그게 결여된 자의 특권이야. 그렇게 부풀어 오른 감정과 의미로 얼룩진 글을 쏟아 낸다. 그들이 머물다 간 너그러운 텅 빈 공간 속에.



안느가 피아노를 치는 광경, 식기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그가 설거지하는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단지 조르주 그가 본 것을 거짓된 환영이라고만 치부할 수 있을까. 과거에 아름다운 음악이 머물렀던 공간. 지금은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음악보다 초라한 공간일까. 화려한 욕망과 불꽃 튀는 충동, 풋풋하게 피어난 시작과 시원스럽게 퍼지는 즐거움, 그 바깥에는 이 모두를 덤덤히 떠안는 사랑이 있다. 조르주가 아픈 안느와의 일관되고 지속된 일상을 기꺼이 함께하고, 마침내 고생스러웠던 두 손으로 직접 그 생활을 끝낸 후. 거짓말처럼 그가 지극히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가 자연스레 말하고 움직이는 안느의 환영을 따라 집 밖을 나섰을 때. 완성된 사랑을 보았고, 나 역시 사랑을 향해 닫힌 문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 길로 또박또박 나아갈 수밖엔.





<아무르>의 마지막, 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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