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더 좋아하는 아이가 서운한 아빠들에게
오늘도 어김없이 힘들었던 일상을 보상받고자
집에 가면 아이가 달려와 안기고 뽀뽀해주길 바라지만
현관문을 여는 순간 나는 안다.
허황된 꿈이라는 걸
오늘도 아이는 야심차게 숨어 있다.
퇴근한 악당이 찾길 바라면서
아무래도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아이와의 교감에 정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나는 혼자 아이를 돌보는 시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모르는 엄마와 아이 사이의 교감이 있다.
아침에 씻기고 밥 먹이고 옷 입히고 어린이집을 보내도
저녁에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과일 먹고 춤추어도 나는 느끼지 못하는 모자간의 교감이 있다.
한 밤중 아이의 미세한 떨림에도 금세 일어나 안아주는 일을 나는 잘하지 못한다. '그랬구나', '그렇게 생각했었구나'하며 한 자리에 오래 앉아서 아이의 이야기를 끈기 있게 듣지 못한다. '중요한' 일의 기준을 아이의 기준이 아니라 나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아빠는 엄마가 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는 내 와이프가 될 수 없다.
엄마가 되고자 하는 아빠에게,
아빠가 엄마일 필요는 없다.
아이가 뛰어놀다가 무릎이 까졌을 때,
아빠와 엄마 둘 다 화들짝 놀라, 뛰어가서 눈물을 흘릴 필요는 없다.
아이가 학교에서 친구와 싸우고 왔을 때,
아빠와 엄마 둘 다 회초리를 들고 싫은 소리 할 필요는 없다.
엄마가 책을 읽어준다면, 아빠는 축구를 같이하면 된다.
퇴근할 때 뽀뽀 대신에 숨는다면, 얼른 악당으로 변신해서 찾아내 들쳐 업으면 된다. 자전거 타다가 넘어졌을 때 연고 발라주는 엄마 옆에서, 균형을 잘 잡는 법을 알려주면 된다.
단, 각자의 역할은 관통하는 육아 철학안에서 이뤄져야 한다.
자칫,
아빠는 스르륵 넘어가 주는 사람, 아빠는 말보다는 행동으로 놀아주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럼에도 아빠도 엄마여야 할 때는 있다.
엄마가 야근할 때,
엄마가 외출했을 때,
엄마가 더 이상 집에 오지 못할 때,
아빠는 엄마가 되어야 한다.
각자의 방식으로 엄마가 되어야 한다.
엄마와 아빠는 섹스의 관점도 아니며, 젠더의 관점도 아니다. 단지 가정에서의 역할론적인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