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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Nov 22. 2024

별 것 아닌 것으로도

사람은 우울해진다. 충분히. 


팀원들은 글을 잘 쓰는 나에게 우리가 괴롭힘 당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라고 했다.

아주 매콤한 블랙 코미디가 될 것이라며 나를 독려했지만 당시의 나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소설로 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야 했다.

나는 박팀장의 얼굴을, 목소리를, 그의 말투와 눈빛을 퇴근 이후에도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당시 내게 그것은 어떤 형벌보다도 가혹한 것이었다.


다만, 백서를 썼다.

업무시간 동안 박팀장이 저지를 악행을 엑셀에 정리하기 시작했다. 


야무지게 리더십, 업무능력 등 카테고리를 네 개로 만들어서 

각 카테고리별로 셀 하나씩 채워가기 시작하니, 두 달이 안돼서 100개의 셀을 채웠다. 


하지만 막상 그 셀을 하나하나 읽어보면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겪어보지 않는 타인은 백서에 쓰인 내용과 우리가 겪은 괴롭힘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다.

마치 우리 다섯 명이 겪은 일이 우리의 피해의식인 것처럼 우리 탓을 하기도 했다. 

팀원들이 서로를 의지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것이 각자 개인의 문제라고 치부해서 더욱 곪아버렸을 것이다. 


백서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면, 

그는 언제나 모든 업무 논의를 할 때 극단적으로 대응했다.

가령, 사과는 이 업무에 맞지 않는다고 의견을 내면

'여기서 사과를 쓰면 네가 죽기라도 한다는 거야?'라는 식의 반응을 해서

더 이상 건설적으로 논의할 의욕을 떨어트리곤 했다. 


또한 그는 임원에게 보고를 하고 와서도 무슨 피드백을 들었는지 우리에게 공유해주지 않았다. 

프로젝트가 잘 끝나서 포상을 받게 되더라도 한 번도 팀원들에게 칭찬을 한 적이 없었다.


한 번은 면담 시간에 내가 울면서 부탁을 한 적이 있다.

입에 발린 소리라고 할지라도 우리를 인간답게 대우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는 내 앞에서 그는 당황한 듯 '일을 잘한다'는 칭찬을 내놓았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는 다시 우리와 소통하지 않는,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보고서를 써오기만을 바랐다.

리더답게 우리를 이끌지 않고, 이끌 능력조차 없었으며.

보고서 한 줄을 혼자 읽지 않고, 무조건 팀원들이 하나하나 전부 설명하게 만들었다. 


업무 중에 우리 중 하나가 자기 의견에 반하는 말이라도 했다가는

며칠 동안 다른 팀원들에게 보여주든 강압적인 말투와 표정으로 그 직원을 집중공격했다. 


당시에 가장 지독하게 당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박팀장은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팀원을 수시로 무시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주었고, 사무실이 싸늘해지도록 언성을 높였다. 


결국 그는 익명의 직장 내 괴롭힘 조사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냐는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고,

이 때문에 사무실이 또 한 번 소란스러운 적도 있었다.


우리는 모두 평가기간만을 벼르고 있었다. 


그전까지 우리는 최대한 그에게 좋은 평가를 주었다.

혹시 그에 대한 안 좋은 평가가 우리 팀 전체에게 영향을 미칠 수도 있었고,

좋은 평가를 받은 그가 혹시 다른 곳으로 승진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때,

우리는 모두 합심해서 그에게 박한 평가를 내렸다.

평가 문항 하나하나를 읽을 때마다 가장 객관적으로 그에 대해 답하는 것에 대한 결과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백서를 공유하며 낄낄거리고 평가를 기다리며 그가 적어도 임원에게 한소리라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랐다.


평가결과가 끝나고, 그는 회사 전체의 부서장 중에서 가장 낮은 평가를 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승진했다. 


우리가 회사를 향해 아무리 아우성을 쳐도 

회사는 더 높은 사람의 편임을 온몸으로 깨닫자 견딜 수 없는 무기력이 다시 찾아오고 말았다. 

팀원들은 서로 씁쓸하게 웃으며 

우리는 그를 정상으로 올려주는 이름 없는 셰르파 일 뿐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을 했다. 


병원에 가서 내게 주어진 시간 내에 평가기간 동안 겪었던 일을 설명하느라 말이 빨라졌다.

선생님이 나의 무력감에 대해 공감을 해주시며 보냈던 응원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눈빛이 아니었다면 내 영혼의 어디가 얼마나 부서져 있었을지

나는 상상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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