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으로 한참 스트레스를 받을 때
일명 지랄비용으로 다이어리와 노트, 스티커들을 잔뜩 샀었다.
몇 번의 쇼핑만으로 무언가를 더 사고 싶은 욕구도 금방 사그라드는 덕분에 큰 비용이 들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이어리에 마음대로 스티커를 붙이며, 우울증을 날려버리기 위한 일기를 썼었다. 아니, 썼다고 기억했다.
문득 작년과 재작년에 썼던 다이어리를 들춰보았다.
내가 기억하는 것 이상으로 생생한 경험들이 글자들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어쩌면 어슴푸레 예상하고 있었다.
남들이 웃으며 회사에서의 분노를 거름 삼아 소설이나 드라마를 써봐,라고 했을 때 한사코 고개를 저은 것처럼,
당시의 나는 기억하지조차 거부했기 때문에 다이어리에 구체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도 거부하고 있었다.
다이어리에 남아있는 것은 약봉지와 주사 스티커, 빨간색 엑스표 스티커, 슬픈 얼굴의 곰돌이 스티커였다.
글자의 형태를 띤 것은 '시간이 빨리 흘렀으면 좋겠다'는 것과,
'이 고통이 언제쯤 사라질까'하는 추상적인 언어들 뿐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또렷한 것이 있었다면, 정신과 선생님께 상담을 받고 나왔을 때의 느낌이었다.
상담을 받은 첫날, 나는 약을 먹기도 전에 한결 가벼워짐을 느꼈다.
매주 상담을 가는 날 아침마다, 한 주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데 천천히 복기하고 나서
조금이나마 멀리 떨어진 시선으로 시간을 두 손으로 톺아보는 시간이 내게는 참으로 매력적이었다.
그건 치료와 동시에 훈련이기도 했다.
단순히 기분이 다운된 상태로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 내가 어떠한 일 때문에 어떤 기분인지를 명료하게 설명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상담실에 들어가기 전에
아침에 급하게 세수를 하고 옷을 챙겨 입으며, 일주일 동안 내 기분이 어땠는지를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은 새롭고 소중했다.
그리고 상담실에 들어가 이야기를 하고 나면, 선생님은 내 기분이 가진 의미를 알려주셨다.
그전까지는 내가 갖게 된 기분과 내가 겪은 경험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 깨닫지 못했다.
나의 기분은 단순히 우울함, 화남이 아니라 서운함, 배신감, 황당함, 허탈함과 같이 구체적인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한 내가 왜 서운하고, 허탈한 지 그러한 감정이 일반적인 것인지를 선생님께서 알려주시면서
나는 시처럼 모호한 감정을 명료하게 해석할 수 있는 평론가를 만난 기분이 들었다.
이는 단순히 감정을 해석하고 갈무리하는 것을 뛰어넘는 일이었다.
상담을 통해서 나는 스스로가 어떤 상황을 남들보다 싫어하고 견디지 못하는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내가 나라는 사람에 대해 한 발짝 더 다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쓰는 일기장은 비록 나에게 많은 비밀을 숨기고, 때로는 거짓말을 하지만
상담을 통해 나는 진짜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조금씩 더 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