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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원 Jul 20. 2017

물이 끓기 전까지 일어나는 일들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레이먼드 카버는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인기가 너무 많아 읽기 꺼려지는 작가였다. 심지어 무라카미 하루키 조차 레이먼드 카버를 좋아했으니 그의 인기를 알 만할 것이다. 수많은 열광 인파에 몰려 굳이 줄을 서고 싶지 않았던 오만방자함 문에 오랜 시간동안 그의 책들은 제목만 아는 책으로 남아있었다.

<대성당>을 읽어보니 영국인들이 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고 싶어하지 않는것처럼, 나는 미국인이 아닌데도 미국인들이 레이먼드 카버를 영국의 셰익스피어만큼 자랑스러워 할 것 같았다. 그가 가진 감성은 한정된 계층만의 이야기로 특정 시대 속 주인공들을 ‘구경’하는 방식이 아니라, 읽는 독자가 맨하튼의 백만장자든 슬럼가의 빈민이든, 혹은 백인이든 유색인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더욱 미국을 대표하는 작가라는 수식어가 어울린다.

철학자인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언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개념적이고 규정적이므로 보다 원초적이고 정서적인 것을 담아내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한다. 레이먼드 카버는 이 문장을 소설로 증명한다.
‘관계의 끝’이나 ‘희망’을 글자로 적어버리면 오히려 그 의미는 희미해진다. 그러나 레이먼드 카버는 이것을 이야기로 풀어내었다. 심지어 그의 작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이야기로 표현되지 않는 '그 무언가'이다.

표제작 <대성당>을 어느 언어로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레이먼드 카버 자신조차 작품의 의미를 말로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조차 눈으로 볼 수 없는 대성당이라는 소재 하나만으로 우리는 종교적인 경건함마저 느낄 수 있다.


이 책 속의 이야기들이 모두 경건하고 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작품 <깃털>에서는 다른 사람과 비교하며 자신의 삶에 행복을 찾는 사람들의 비열한 면을 들춰낸다. <칸막이 객실>에서는 순간에 심취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행동하다 어느 순간 급브레이크를 밟은 남자의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한다. 레이먼드 카버가 <칸막이 객실>의 주인공처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는 아들을 실제로 찾아간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 이 이야기의 결말이 좀 더 흥미롭게 느껴질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은 하루동안 보고, 듣고, 말한다. 대개는 비슷한 것을 보고 듣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보고 듣는것이 아니라, 얼마나 ‘신경써서’ 들었는지다. 영어의 listen 과 hear의 쓰임새가 다른 것처럼, listen하기 위해서는 hear보다 조금 더 신경써서 들어야 한다. 이 책은 hear와 see의 이야기가 아니고, listen과 watch의 이야기이다.

 <대성당>을 읽을 때에도 ‘신경써서’ 읽지 않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놓치기 쉽다. 같은 책을 읽음에도 독자에 따라 느끼고 생각하는 바가 달라진다.

‘물이 끓는다’라는 문장은 단순하다. 누구나 물이 끓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그러나 물이 끓기까지 물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지를 생각해보는 사람은 많지 않다. 레이먼드 카버는 <대성당>을 통해 물이 끓는 모습이 아닌 끓기 직전까지의 과정을 독자들에게 이야기한다.

누군가의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만한 사건이 사실은 엄청나게 사소하다는 것.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타인에게 설명해 보아도 어떤 무심한 사람은 끝내 알아듣지 못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책에도 무심하게 흘렸다가는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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