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현실]에서 맛보는 통찰
파리대왕, Lord of the flies. 소설 제목이라는 것을 모른다면 떠오르는 것은 바로 바알제붑(Ba'al Zebub), 지옥의 3대 악마 중 하나일 것이다. 물론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진 상식은 아니고, 성경을 열심히 공부했거나, 서브컬처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나 흔히 퍼진 지식이다.
예전 중세 시대 즈음부터 파리는 역병의 상징이었다. 현대에 와서도 파리는 병균을 옮기고 다니는 해충으로 인식되고 있다. 즉, 파리에 대해서 좋은 이미지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냄새나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파리떼가 꼬여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그런 장소를 꺼릴 것이다. 그렇다면 대체 왜 ‘파리대왕’이라는 제목을 사용했을까?
바알제붑이니 뭐니를 몰라도 파리의 대왕이라는 것은 좋은 이미지를 전달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소설 속 내용이 그렇게까지 추악하거나, 더럽거나, 악마를 숭배한다거나 하지도 않는다. 물론 악마의 속삭임이 연상되는 장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소설 전반에 걸쳐 지속해서 일어난다거나, 모든 등장인물에 일어나지도 않는다.
다만 바알제붑은 7대 죄 중에서 탐욕(식탐)을 상징하는 악마다. 게다가 식욕은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이며, 파리대왕 소설과 같이 유사 아포칼립스 환경에서 먹을 것이란 매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다. 실제로 파리대왕 소설 속에서도 음식 때문에 고생하는 장면이 계속해서 나오며, 고기를 얻기 위해 사냥을 시작하면서부터 아이들의 갈등이 야기되고, 야만성이 깨어나기도 한다.
소설 파리대왕은 계속해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무인도에 떨어진 아이들이, 아직 교육이 끝나지 않아 완전히 문명화되지 않은 아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인간의 3대 욕구는 성욕, 수면욕, 식욕이다. 작가는 성욕이 아직은 그렇게 크지 않을 아이들로 등장인물을 설정했다. 여자아이가 전혀 없어서 더더욱 성욕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지 않다. 그리고 수면욕은 어쨌든 가장 충족하기 쉽다. 더운 날씨의 무인도라서 잠자리를 제대로 만들지 않아 죽을 일도 없다. 즉, 3대 욕구 중, 당장 부족하고, 채우기 힘든 것은 식욕밖에 없다.
3대 욕구는 가장 원초적인 욕구이다. 그리고 아이들은 교육받은 대로 질서 있게, 토론하며, 민주주의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만을 하려고 한다. 주인공인 랄프가 어떻게든 질서를 세우려 하지만, 계속해서 실패하고, 랄프 자신도 나중에는 무질서한 놀이에 동참하기도 한다. 아주 원초적으로, 본능대로만 행동하는 것이다.
게다가 과일, 생선만으로는 필요한 양을 채우지 못하니 고기를 먹으려고 멧돼지를 사냥한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 다른 생명을 해치기 시작한 것인데, 계속해서 본능이 이끄는 대로 사는 아이들이 과연 동물의 생명만 취하기 위해 절제할 수 있을까? 작가는 아주 치밀한 설계를 통해 당연히 동물의 생명에서 사람의 생명을 취하는 것까지 이야기를 전개한다.
아이들의 일부가 사냥을 시작하면서 점점 야만적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고기를 위해서 사냥했지만, 나중에는 재미를 위해서 사냥하게 된다. 마치 식욕에 숨은 악마(바알)가 아이들을 더 악한 방향으로 꼬드기는 것처럼...
그럼 만약, 현대사회에서, 한국에서 대학교까지 졸업한 남자들이 무인도에 불시착해서 이렇게 생존해야 한다면, 과연 결말이 달라질 것인가? 사람들은 죽지 않고, 잘 협력해서 문명인답게 기약 없는 구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다가 구조될 것인가? 사실 이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수많은 아포칼립스 물에서 이미 사람들이 협력하는 모습은 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물론 소규모 그룹끼리 협력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아포칼립스 물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좀비같은 괴물이 아니라 같은 사람이라고 은연중에 반복해서 강조한다.
우리는 모두 문명인의 탈을 쓰고 있지만, 아주 깊은 마음속 매우 근본적인 나의 근원에서는, 그리고 나의 본능에는 문명이 제어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다. 단순히 성악설, 성선설 등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매우 복잡한 생물이고 단순히 선, 악 두가지 측면으로 구분할 수 없다.
랄프나 피기처럼 끝까지 야만적인 아이들에게 대항해 문명을 지키려는 이도 인간이고, 잭처럼 별다른 반항 없이 바로 야만에 물드는 이도 인간이다. 물론 파리대왕처럼 야만에 물드는 것이 쉬워 대다수 인간이 야만에 물들 수 있다. 이를 정하는 것은 나 자신이며, 파리대왕에 나오는 아이들처럼 쉽게 야만에 물들 거나, 문명을 지키고 싶어도 너무 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으려면 내 안에 있는, 아주 깊숙한 곳에 있는 나의 진짜 본능이 어느 쪽인지, 혹은 어느 쪽이 되길 원하는지를 잘 살펴보고 성찰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