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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운 Sep 05. 2022

전공의에게 드리는 선물

내 감정 그래프는 진폭이 크다

2022년 2월 10일, 입원 17일 차


오늘 오전 프로그램은 '작문 요법'이었다. 글쓰기를 좋아하는 나는 작문이라는 얘기에 바로 참여했다.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같이 나눠 보는 시간을 가졌는데, 부모님에게 감사한 것 세 가지, 죄송한 것 세 가지, 서운한 것 세 가지를 적는 시간이었다. 각자의 기억과 아픔을 공유하는 자리인 듯했으나 대화를 해 보니 다들 비슷한 아픔을 가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모두의 아픔을 한꺼번에 안아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으면서도, 그게 내 역량은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요법이 끝난 후, 이상하게 자꾸 짜증이 나고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 감정의 뒤에 '왜?'를 붙여 본다면, 다른 사람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으며 이입이 되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나와 내 가족들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그리고 깊이 있게 들여다 보는 그 과정이 어려웠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다행히(?) 복지사 선생님이 힘들어하는 나를 발견하셨고, 그는 내가 이렇게 괴로워하는 것이 모두 아직 내가 불안정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감정을 안정화하는 것이 우리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이고, 시간을 좀 들여야 한다고 했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한 거냐고 말하며 소리내어 울었다.

이게 나아지기는 하는 걸까? 도대체 나는 언제쯤 안정되는 걸까? 복지사 선생님은 그런 건 생각하지 말고 일단 현재, 지금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힘든 날에는 지금에 집중하기가 어려운걸.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현재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걸까? 나만 이렇게 괴로운 걸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2022년 2월 11일, 입원 18일 차


자기 전에 몇 자 적어 본다.


씻으며 여러 생각을 했는데 배수구로 다 흘려 보내 버렸는지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구한 밈(meme) 중 하나로 '샤워할 때만 온갖 아이디어와 생각들이 떠오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 듯하다.


담당의와 마지막 면담을 했다. 내 담당의는 내가 입원해 있는 병원 소속이 아니라, 약 2개월 정도 잠깐 파견을 나온 1년차 레지던트로, 오늘을 마지막으로 원래 본인 소속인 병원으로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껏 병원을 여러 번 옮겨 봤는데, 이렇게까지 라포 형성이 잘 된 의료진은 나에게 처음이라 헤어짐이 아쉽고 동시에 두려웠다. 내가 이 선생님 없이 잘 지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면담은 생각보다 담담했고, 평소와 비슷했으나, 마치 상담 마지막 회기처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마무리 짓는 듯한 말씀을 많이 하셔서 그 부분이 조금 속상하고 슬펐다. 그렇지만 마지막 면담이 맞긴 하니까.

담당의는 나에게 또 다시 '내 안의 변호인'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내 맘 안에 자꾸 나를 공격하려는 존재가 있다면, 내 안의 변호인의 힘을 키워 나를 방어해 주고 아껴 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기자의 힘도 약화시켜야 한다고.

담당의는 또, '나'와 '내 생각'을 분리해야 한다고 했다. 내가 한 생각이지만 '내 생각'은 분명히 '나'와는 다른 것이라고 했다. 내가 자꾸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하고, 자해, 자기 혐오 등 좋지 않은 생각들을 떠올리더라도, 그건 '내 생각'이지, '나'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바로 생각과 나를 분리하고, '왜?'라고 덧붙이고, 그건 병이다!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시키라고 했다. 예를 들어, '다른 친구들이 힘든 얘기를 털어놓으면 괜히 화가 나. 나는 쓰레기야.'라는 생각이 들면 곧바로 '왜? 왜 내가 쓰레기야? 난 조금 예민할 뿐이야.'라는 식으로 대답하는 것이다.


담당의에게 마지막으로 A4 클립보드를 선물했다. 담당의께서 항상 들고 다니시는 플라스틱 클립보드가 약간 부러져 너덜너덜했기 때문이다. 바깥에 계신 부모님께, 짐을 전해 주러 병원에 오실 때 새 A4 클립보드를 함께 갖다 달라고 부탁을 드렸다. 담당의는 내 눈앞에서 바로 클립보드를 바꿔 주면서, 정말 고맙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나는 담당의에게 "저는 선생님만큼 좋은 의사 못 봤어요. 선생님은 정말 좋은 교수가 되실 거예요."라고 말했고, 담당의는 "제가 교수가 됐을 때쯤에는 적운 님이 병원에 발 들일 일 없길 바라요. 그땐 제가 적운 님 이름을 인터넷에서 보면 좋겠어요. 아주 좋은 작가로요."라고 말했다. 그의 그 말이 다정한 위로로 오랫동안 마음에 자리잡아 있을 것만 같다.


담당의와의 마지막 대화를 오래도록 기억에 남기고 싶어 적어 내려 본다.

"선생님, 선생님은 제게 최고의 의사였어요. 선생님은 누군가에게 평생의 최고의 의사이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제가 2등이든, 3등이든, 꼴등이든 상관 없어요. 그냥 도움을 줄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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