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적운 Sep 03. 2022

부모님을 미워하거나 용서하거나 사랑하거나

내 감정 그래프는 진폭이 크다

2022년 2월 7일, 입원 14일 차


수액을 맞았다. 며칠 동안 밥을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을 아무리 마셔도 입안이 사막처럼 메말라서 음식을 넘기기가 어려웠다. 머리도 아프고 어지러워서 담당의와의 대화 끝에 결국 수액을 맞기로 했다.

오늘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면담을 했다. 우리의 면담 주제는 술과 자해 충동이 중점이었다. 복지사 선생님은 내게 술을 끊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했고, 나는 그게 그렇게 쉽지가 않다고 대답했다. 그는 스스로 술을 절제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고 한 번에 끊어내야 한다고 했다. 절주가 아니라 단주를 하라는 얘기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게 가능했다면 진작에 해내지 않았을까요,라고 말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술이란 건 원래 알코올이라는 물질에서 오는 기쁨도 있지만 술을 마신다는 '행위'에서 오는 기쁨도 있다고 했다. 나는 둘 중에서도 후자를 조금 더 즐기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것도 즐겁지만, 역시 사람들과 모여 시끄럽게 떠들다 알코올에 거나하게 취하는 것,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취하는 게 싫어 술을 안 마신다던데 난 알딸딸하게 취하는 그 기분이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다. 과연 이런 내가 술을 끊을 수 있을까?

또 복지사 선생님은 내 생각의 프로세스에 대해 설명해 주셨다. 내가 어떤 인풋을 넣든, 똑같은 아웃풋을 내놓는다는 것이다. '죽고 싶다'는 아웃풋. 그는 내가 이것을 끊는 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내 머릿속에서 이 프로세스가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도 중요하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담당의와의 면담에서는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내가 짜증과 분노 등, 감정이라는 말에 타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감정에 끌려다닌다는 생각이 들 거라고. 말에서 내릴 때도 됐다는 식으로 말씀하시기에, 내가 도대체 말에서 어떻게 내리냐, 달리는 말에서 뛰어내리기라도 해야 하냐고 여쭸다. 담당의는 일단 내가 지금 말을 타고 있음을 깨달으면 그것만으로도 됐다고 했다. 그러다 보면 말에서 내릴 수 있게 될 거라고, 어느 순간에는.


무엇을 하든 역시 '앎'이 가장 중요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릿속에서 소리 없이 돌아가는 내 프로세스와, 내가 올라 타 있는 감정이라는 말까지. 언젠가는 둘 다 내 힘으로 멈추거나 내릴 수 있게 되겠지. 그날이 c최대한 빨리 찾아오면 좋겠다.




2022년 2월 8일, 입원 15일 차


오늘도 어제처럼 면담을 두 번 했다. 복지사와의 면담, 전공의와의 면담.

복지사 선생님은 다시 한번 내 생각의 흐름이 언제나 똑같다고 말씀하셨다. 어떤 인풋에도 똑같은 아웃풋, 즉 '죽고 싶다'는 생각으로 귀결되는 흐름. 지금은 어떤 생각을 하냐고 물으시기에 '밖이 시끄러우면 마음이 따라 소란스러워지고, 그에 따라 불안해지면서 죽음이 떠오르고, 결국에는 죽어야겠다고 생각한다'라고 얘기했다. 가만히 듣던 복지사는 내 생각이 굉장히 논리적인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하나도 논리적이지 않고, 중간에 엄청난 점프가 있으니 그걸 알아채야 한다고 했다. 지금 당장은 아마 생각나지 않을 테니 일단은 이 생각을 끊어낼 수 있도록 퍼즐이나 컬러링 북을 하는 것이 도움 될 것이라 했다. 병원에 들어올 때 컬러링 북을 가져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지사와 얘기를 하던 도중, 그가 갑자기 '너 스스로가 네게 1순위였던 적이 있느냐'라고 물어 왔다. 나는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아니라고 답했다. 나는 늘 연애 대상이 내 1순위이거나, 친한 친구들이 내 1순위였다. 나는 2순위나 3순위도 아니고, 한 10순위쯤, 그러니까 순위권 밖에 존재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다. 복지사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1순위에 부모가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니 나를 1순위로 둘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라고.


저녁을 먹은 후에는 담당의와 면담을 했다. 이번에는 술에 관한 얘기를 주로 했다. 술이 너무 마시고 싶다고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그렇게 술을 좋아하시냐 물으시기에, 술을 마시면 '진짜 나'를 거리낌 없이 보여 줄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고 대답했다. 웃음도 많고, 울기도 하고, 자해도 하고. 술을 마시면 충동성이 더 올라오면서 감정을 쉽게 내비칠 수 있고, 사람들도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술을 마시는 거라고. 선생님은 한 번에 다는 아니더라도 조금씩 '진짜 나'를 술 없이도 보여주자고 했다. 어렵겠지만. 난 '진짜 나'를 보여 주면 사람들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러자 담당의는 친한 친구를 한 명 떠올려 보라고 했다. 그 친구가 앞서 말한 '진짜 나' 같은 모습을 보이면 친구를 싫어할 거냐고 물었다. 난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친구가 아닌걸.

또, 담당의와 가족 관련 이야기도 했다. 부모가 나에게 관심을 가지는 게 부담스러울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시험 성적이 낮으면 혼이라도 날까 봐 전전긍긍하던 어린 날의 나. 엄마와 아빠도 나 때문에 힘든 날이 있었겠지만, 나도 분명 엄마 아빠 때문에 힘든 날이 있었다.

내가 부모를 용서해야 하는 건지, 사랑해야 하는 건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건지, 미안해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고등학생 때부터 집을 나와 기숙사 생활을 한 나에게는 부모와 함께 보낸 절대적인 시간의 총량이 부족한 게 아닐까.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 지금보다 더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 부모님은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부모님은 나를 용서했을까, 사랑할까, 받아들였을까, 미안해하고 있을까.


이전 08화 병원에서의 비非일상을 즐기세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