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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적운 Sep 10. 2022

분노도 조절이 가능한 거였나요 下

내 감정 그래프는 진폭이 크다

2022년 2월 26일, 입원 33일 차


자꾸 죽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상상을 한다. 죽은 쪽이 상상일까, 내려다보는 쪽이 상상일까. 물론 둘 다 상상이지만……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내 상상인지 점점 헷갈리기 시작한다.

같은 병실 친구가 오늘 오전 퇴원을 했다. 친구의 빈자리가 어색하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친구가 걱정된다. 과연 밖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여기 다시 돌아오는 건 아닐까? 그렇지 않으면 좋을 텐데.


요 며칠 계속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살기 위해 들어온 이곳에서 나가, 내 손으로 직접 죽고 싶어졌다. 몇 번이고 죽은 뒤, 또다시 죽고 싶다. 나가서 진탕 술이나 마시고 싶다. 자해 따위로는 숨겨지지 않는 이 마음이 눈앞까지 들이닥쳤다.

이 마음을 솔직하게 담당의에게 이야기했다. 선생님은 내게 그 마음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느냐고 물었고, 난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선생님은 사뭇 비장한 표정으로, "우리의 치료 목적은 그 생각이 잘못되었고 깨부수어야 하는 것임을 인지하기"라고 했다. 나는 이 마음을 평생 안고 갈 것만 같아 두려웠는데, 이것을 과연 내가 깨부술 수 있을까? 걱정이 된다.




2022년 2월 28일, 입원 35일 차


복지사와 다시 면담을 했다. 가족 이야기를 할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나의 생각, 내 머릿속의 프로세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에도 얘기한 적이 있는, 어떤 인풋을 넣어도 똑같은 아웃풋이 나오는 나의 프로세스. 아웃풋은 모두 다 자기혐오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그는 이 프로세스로 인해 내가 자꾸 남 탓을 하지 못하고 내 탓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 스스로 이 모든 것이 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에, 눌러 놓았던 화가 불쑥불쑥 치밀어 올라 분노와 짜증이 튀어 오르곤 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내게, 나는 지금 오만할 정도로 모든 것이 내 탓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했다. 남 탓은 0이고 내 탓은 100. 객관적으로 좀 보라고 하시길래, 나는 객관적으로 봤기 때문에 내 탓이 100일 수 있는 거라고 답했다. 복지사는 내 논리가 전혀 객관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세상에는 내 탓 100, 남 탓 0인 일보다 내 탓 30, 남 탓 70과 같은 일이 더 많아요."


우리는 면담을 하면서 나의 폭력성과 분노에 관해서 더 깊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마음속 분노라고 하는 그릇에는 이미 99.99만큼 쌓여 있어서 여기에 스포이드로 0.1을 떨어뜨려도 금세 넘치는 거라고 하셨다. 근데 또 나는 자존감이 낮으니 남을 해하지도, 나를 화나게 한 사람에게 따지지도 못하고, 결국 그것이 자해로 이어지는 것이라고. 복지사는 이렇게 원인을 인지하고 인정하면 이제 시작이라고 하였다. 이제부터는 분노를 제대로, 잘 표출할 줄 알아야겠지. 억누르는 것만이 답은 아닐 것이다.

복지사와는 약속을 하나 했다. 분노나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가 가라앉은 후, 다시 내 감정을 돌아볼 수 있을 때, "모르겠어요"나 "이유가 없어요"로 일관하지 말고, 감정을 더듬어 보면서 어떤 생각에서 비롯된 어떤 감정인지, 그 감정으로 인해 나는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하였다. 잊지 않으려고 면담 내내 되새겼다. 생각, 감정, 행동, 생각, 감정, 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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