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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 imagine Oct 19. 2023

나도 한때는 패러글라이딩 파일럿 유망주였다

운동을 못한다고 했지, 안 한다고는 안 했습니다

연애가 상대방과의 공통점을 발견하며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라면, 결혼은 상대방과의 차이점을 발견하며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대개 연애는 짧고, 결혼은 길다. 우리는 공통점을 찾아가며 빠르게 사랑에 빠지지만, 우리가 이렇게 다른 사람이었던가를 확인하며 서서히 사랑이 식어가게 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나는 남편이 운명의 존재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렇게 나와 비슷한 사람이 있을까 싶었다.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부터 (남편은 어떻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당연히 지금의 남편과 결혼할 것이라 확신했다. 나 혼자만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탓인지, 결혼하는 과정이 순탄하게 흘러가지는 않았으나 어찌 되었든 간에 현재의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결혼은 서로가 얼마나 다른지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신혼 때만 하더라도 나는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남편과 나의 다른 점을 발견할 때마다 서운하고 화가 났다. 연애할 때만 해도 나는 그가 무던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인 줄 알았다. 내가 무얼 하던지 지지하고 이해하고 인정해 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무척이나 예민하고 까탈스럽고,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어떤 사건을 보고 늘 다르게 생각했고, 나보고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묻곤 했다. 나는 결혼을 하면 대부분의 시간을 항상 배우자와 보내야 한다고 믿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면 같이 산책하고, TV 보고, 늦게까지 치킨 먹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주말에는 그저 가까운 근교라도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부부라면 늘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부라면 늘 같은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부부라면 상대가 좋아하는 것에 가끔은 맞춰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돌이켜보니 드라마를 보며 체득한 결혼에 대한 환상들은 결혼하며 사는 내내 실망스럽고 내가 무지했구나를 절절하게 느끼게 해 준 가장 큰 실패 요인이었다.      


당연히 그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같은 한국어를 썼으나 사고체계가 전혀 달랐다. 그는 본투비 공대생이었고, 나는 뼛속까지 문과생이었다. 나는 겁이 많았다. 그는 좀 더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위해 책임을 기꺼이 껴안는 사람이었다. 나는 남편이 혼자 친구들을 만나러 나가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아이들과 경기도 외곽에 있는 집에 남겨져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 상황이 싫었다. 당시만 해도 아이들이 어렸고, 나는 운전을 못했으며, 동네에 친구도 없었다. 나는 늘 외로웠다. 지금만 해도 지하철이 생겨서 어디든 제법 가깝게 다녀올 수 있지만, 십 년 전의 나는 늘 우울했다. 경기도 외곽에 사는 내가 어디든 가기 위해서는 2만 원 넘게 택시비를 내야 했다. 가끔 분당에 사는 친구를 만나러 가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택시비는 6만 원이 훌쩍 넘었다. 남편은 사회생활하느라 바쁜데 나는 집안에 파묻혀 계속 가라앉고 있는 것 같았다. 주말이면 그저 시댁에 가서 밥 먹고 오는 것 말고는 딱히 날 위해 그 어떤 것도 기획하지 않는 남편이 미웠다. 왜 날 위해서는 무엇하나 찾아보지 않는 건지 짜증스럽기만 했다. 불만이 적금처럼 차곡차곡 쌓여가던 나날이었다.     


그러던 무렵, 남편이 패러글라이딩을 배워보고 싶다고 했다. 티X에서 패러글라이딩 특가가 99만 원에 나왔다며 하면 안 되겠냐고 하길래, 나도 해보고 싶었다며 남편의 바짓가랑이를 잡았다. 첫째가 18개월 정도 되었을 때였다. 그냥 뭐든 같이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가족이 유지될 것이라 생각했다. 남편이 춤을 배우고 싶어 했다면 따라 배웠을 것이고, 스킨스쿠버를 하고 싶어 했다고 해도 따라갔을 것이었다. 내가 그렇게 하고 싶은 취미는 아니지만, 남편과 함께 뭔가를 해야 한다면 내가 충분히 맞출 수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리고 그래야만 사이좋은 부부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다. 그래서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친정 부모님께 첫째를 맡기고 처음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기 위해 1박 2일 문경으로 갔던 날. 아이 없이 둘만 여행을 간다는 기쁨과 설렘이 모든 긴장감을 압도했다. 오랜만의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패러글라이딩이 뭔지도 몰랐다. 스카이다이빙처럼 헬기에서 뛰어내리는 건 줄 알았는데, 패러글라이딩은 산 정상의 활공장에서 달리면서 서서히 내려가는 스포츠였다. 스포츠라기에도 살짝 애매하다. 나처럼 못하는 초보는 그저 바람에 휩쓸려 떨어지기 바빴고, 고수들은 대기의 열을 이용해 더 높이 올라가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도 했다. 양평에서 시작해 강릉에서 회를 사 먹고 돌아온다는 무용담을 들으며 언젠가 우리도 부부 파일럿이 되어 아이들 하나씩 텐덤으로 둘러메고 강원도 하늘길로 여름휴가를 떠날 상상에 잠기기도 했다.      


남편과 함께 떠나는 주말 패러글라이딩은 늘 즐거웠다. 서로 한 번씩 아이를 보고, 한 번씩 타고 돌아와 팀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며 맥주를 마시는 시간이 꿀 같았다. 아이는 트럭에 타고 산 정상에 올라서 신나게 놀다가 기절하듯 잠들었다. 항상 먼지 구덩이에 있었고, 세 가족이 모두 꼬질꼬질하기 짝이 없었으나 주말마다 비만 내리지 않으면 떠나는 여행이 만족스러웠다. 우리 가족은 화목한 가족답게 주말이면 패러글라이딩 같이 특이한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내 허영을 제대로 채워주었다.      


패러글라이딩의 화룡정점은 단연 스페인 원정 비행이었다. 시작한 지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팀장님을 따라 스페인과 까나리아 제도로 원정 비행을 갈 수 있었다. 우리가 간 까나리아 제도에는 전 세계에서 온 패러글라이딩 국가대표들로 가득했다. 우리나라에서는 끽해야 해발고도 300~400m에서 타게 되어 2~3분이면 착륙장에 도착하는데 까나리아 제도의 활공장은 해발고도가 1000m가 넘어서 10분 넘게 비행을 할 수 있었다. 하루에 2~3분 타겠다고 하루 종일 고생하는 초보로서는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초짜 주제에 전 세계 패러글라이딩 선수들의 뒤풀이 파티에도 참석하며 싸이의 강남스타일에 맞춰 앞장서서 춤을 추었더랬다.     

 

나름 순항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부의 운동이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던 건 분명히 내가 패러글라이딩 하러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남편이 내가 가는 걸 싫어한다는 느낌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분명히 약속했는데 왜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다녀온 날이면 알 수 없는 이유로 툴툴거렸다. 집에 뭐가 없다, 집에 뭐가 안되어 있다며 자꾸 시비를 걸어왔다. 집에 있는 사람이 그건 알아서 해야지, 내가 세팅까지 해둬야 하나. 나도 슬슬 짜증이 솟구치는 상황에서 또 그러기에 한 마디 내뱉었다.     


“아니,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내가 뭘?”

“아니, 내가 오늘 가는 날인데, 나한테 계속 툴툴거리잖아. 뭐가 문제 있어? 왜 날 그런 시선으로 바라봐?”

“내가 어떻게 보는데.”

“내가 가는 게 싫잖아. 지금.”

“나도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 나도 가고 싶단 말이야. 가고 싶은데 그럼 그걸 표현도 못해? 표현하는 것도 잘못이야?”     


나는 있잖아. 자기의 그런 솔직한 표현들이 너무 부담스러워. 우리는 어른이잖아. 설령 패러글라이딩이 너무 가고 싶다고 할지라도 약속 하에 가기로 한 상황의 배우자를 샘내면 안되는 거 아니야? 나도 일주일 내내 힘들었는데, 나도 스트레스 풀러 가는 건데, 굳이 나한테 그렇게까지 해야겠어?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나 패러글라이딩 안 해.”

“응? 왜 안 해?”

“안 해. 하기 싫어. 너랑 같이 안 해.”     

내가 이렇게 얘기하면 남편이 미안하다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는 그런 공감 능력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너 안 가면 나 가도 되지?

“뭐? 간다고? 허, 가. 그럼.”     


내가 못 가는데, 당신이 편하게 잘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아? 설마 진짜 가진 않겠지 했는데, 남편은 진짜 가버렸다. 참내 어이가 없어서. 그 사건 이후, 나는 단 한 번도 패러글라이딩하러 가지 않았다. 내가 계속해서 안 간다고 하면 남편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자고 할 줄 알았다. 전혀. 그는 내가 정말 안 갈 줄 몰랐다는 어이없는 이유를 대며 내가 가지 않겠다고 해놓고 왜 말을 다르게 하냐며 반박했다. 가고 싶으면 가고 싶다고 하고, 가기 싫으면 가기 싫다고 말하면 되지, 왜 가라고 해놓고 기분 좋게 못 보내느냐며 난리였다.    


남편 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패러글라이딩이 하기 싫어진 것도 있지만, 그 무렵 아이 하나에서 아이 둘이 되고 나니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사실 첫째만 있을 때는 ‘될 대로 되라지’라는 마음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하곤 했는데, 자식이 둘이 생기고 나니 나 없으면 내 새끼들 누가 지켜주나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게다가 공중에 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무서워져 버려서 엄두가 나질 않았다. 십 년 전에는 대체 무슨 깡과 생각으로 패러글라이딩을 했었나 싶기도 했다.      


당시만 해도 패러글라이딩을 하는 여자가 워낙 없다 보니, 가면 동호회 회원들이 많이 예뻐해 주었다. 젊고 키도 크니까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패러글라이딩 국가대표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다. 만약 남편의 행동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쯤 패러글라이딩 아마추어계에 이름 좀 날리고 있었을까. 아마 그랬다면 둘째는 없었겠지. 어쩌면 둘째와 패러글라이딩 선수를 맞바꾸었을지도 모르겠다. 골골골 인생에 다시없는 운동 황금기였다. 우애 좋은 부부가 되기 위해 억지로 했던 패러글라이딩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그걸 계기로 자격증을 2급까지 땄으니 헛된 시간은 아니었던 셈이었다. 게다가 스페인 원정 비행은 살면서 떠난 여행 중 두 번째로 재미있었다. (첫 번째는 단연 신혼여행이다.)     


패러글라이딩이라는 운동에 발을 담가보면서 인생에 한 번쯤 국가대표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막연히 해보게 되었다. 마흔 넘어서도 할 수 있는 다른 운동을 찾아보지만 이제 남은 종목은 게이트 볼 뿐인 듯하다. 마흔에 게이트볼을 시작하면 쉰 살쯤에는 엄청나게 잘할 수 있게 된다고 하는데, 얼굴 까맣게 그을려가며 도전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들다가도 이내 내려놓게 된다. 욕심부리지 말자. 이제 겨우 안 아프게 몸을 쓸 줄 알게 된 주제에 국가대표라니. 과한 욕심이다.      


그저 가족 대표로 나갈 수 있는 아이템 정도를 하나 찾아놓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골프는 딸이 잘하고, 탁구는 아들이 잘하고, 남편은 스키를 잘 탄다. 나는 줄넘기를 해볼까. 줄넘기하다 보면 심장이 너무 아팠다. 러닝을 할까? 아우, 무릎이 욱신욱신 쑤셔왔다. 뭘 새로 할 생각하지 말고, 지금 하고 있는 필라테스나 열심히 해봐야겠다. 내가 가족들 중에서는 코어 힘이 제일 좋게 만들어야겠다. 균형 잡는 일은 내가 제일 잘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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