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제대로 숨을 쉬면서 살고자 하는 욕구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가령 운전을 하거나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거나 책을 읽다가 재미가 없어서 이런저런 잡념들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에 갑자기 어떤 특정한 음악이 귀에 꽂힐 때가 있다. 배경음악에 지나지 않았기에 그다지 집중하지도 않고 관심을 두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자연스럽게 들려올 때, 그래서 시간이 멈추고 이리저리 맴돌던 모든 의식이 그 음악의 멜로디와 가사, 가수의 음색에만 모든 것이 집중되는 것만 같은 순간 말이다.
어느 날 운전을 하다가 그런 순간을 만났다. 유독 나의 귀와 마음을 사로잡은 노래는 이하이의 <한숨>이라는 노래였다. 어느새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는 나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날 이후에 플레이 리스트에 이 노래를 추가해서 지겨워질 때까지 계속 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 순간 나에게 그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에 오랜만에 나의 삶에 다시 나타나 준 것일까?
그 노래의 가사는 이러하다.
숨을 크게 쉬어봐요.
당신의 가슴 양쪽이 저리게
조금은 아파올 때까지
숨을 더 뱉어봐요.
당신의 안에 남은 게 없다고
느껴질 때까지
…..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
당신의 한숨
그 깊일 이해할 순 없겠지만
괜찮아요
내가 안아줄게요
이하이 <한숨>
이 노래를 들으면서 문득, 나는 과연 제대로 숨을 쉬며 살아가고 있을까? 누군가의 한숨을 헤아리고 그 깊이를 이해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이해하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라도 하고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기 전까지 단 한순간도 호흡을 멈추어 본 적이 없지만 살면서 숨 쉬는 일에만 온전히 주의를 기울여 본 적은 거의 없다. 끊임없이 숨을 쉬며 살고 있지만 정작 숨을 쉬고 있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들숨과 날숨의 반복은 생명의 원초적인 리듬과도 같다. 요가를 하거나 명상을 할 때에도 이러한 숨이 나가고 들어가는 과정, 호흡에 집중하라고 강조한다. 그 이유는 호흡을 통해서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는 동안 자신의 감각과 신체의 변화를 관찰할 수 있고, 이는 곧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는 나에게 집중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매트 위에서도 몸의 움직임은 항상 호흡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내 안에서 일어나는 호흡이라는 리듬을 타면서 몸을 움직인다. 들숨에 좋은 에너지가 내 몸으로 들어오고 날숨에 내 안의 나쁜 것들이 배출되면서 정화되는 것 같다. 특정한 아사나에서 잠시 머무를 때에도 호흡이 함께 라면 그 순간은 그저 가만히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호흡을 통해서 에너지가 순환하면서 나의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움직임과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나도 요가를 만나고 나서야 매트 위에서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있었다. 내가 숨을 쉬고 있고, 살아 있음을 유일하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들숨에 갈비뼈 사이사이로 숨을 가득 채워 넣을 때는 폐와 함께 모든 장기와 온몸의 죽어 있던 세포들이 깨어나는 것 같다. 그리고 날숨에는 내 안의 모든 두려움과 불안, 걱정들이 이산화탄소와 함께 배출되는 것 같다. 그렇게 내가 숨을 쉬며 지금 이 순간 살아 있음에 새삼 감사함을 느낀다. 그렇게 매트라는 작은 우주에서 살아 숨 쉬고 있는 나의 존재를 확인하는 순간들을 마주하게 된다.
누구에게나 제대로 숨을 쉬면서 살고자 하는 욕구와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요가를 하러 온 사람들이 매트 위에서 라도 제대로 숨을 쉬며 이 권리를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
요가 강사로서의 목표가 있다면 정신없이 바쁜 하루를 보낸 뒤 지친 몸으로 매트 위에 앉은 사람들에게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따뜻한 시간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렇게 호흡을 느끼면서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가치 있다는 것을 느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런 순간들이 많아진다면 타인의 무거운 한숨도 그저 무심하게 지나치지 않고, 먼저 손을 내밀어 주는 용기를 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당신은 제대로 숨 쉬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