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해 몇프로 떼어놓으면 이만한 직업도 없다.
엄마가 되기 전엔
그에 관련된 글이 나온다 하면 빠르게 다른 페이지로 넘겼다.
학교 학군에 의해 아파트값이 결정되는 것도 몰랐다.
엄마들의 유난스러운 자식 사랑도 이해하기 힘들었다.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식 때문에 울고 웃는 얼굴들이 낯설었다.
80년생 김지영에서 맘충이라고 손가락질 당하며 쏟아버린 물을 당황스레 닦아내는 모습은 과장되었다.
세상은 그렇게 대놓고 찔러대진 않는다.
다만 장벽 저 너머에서 이쪽 세상에 불편을 끼칠 때 짜증어린 눈으로 바라볼 뿐.
그건 어떤 직업을 가졌어도 마찬가지다.
타인의 실수에 인색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는 것은 가차 없다.
관심 없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40대 어느 날의 일기
이미 그들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같이 출발해서 나란히 달린 것은 아파트를 나와 한강에 접어드는 지점까지였다.
잠실에서 양평까지 가잔 계획은 애초 그녀에게 불가능할 일이라는 것은 모두 알고 있었지만, 가족이란 그런 거였다.
실패가 뻔히 보여도 일단 같이 달려 나가야 하는 운명공동체.
처음에는 십 미터 간격을 두고 뒤를 돌아보던 아이와 남자는 어느 순간 뒤돌아보는 것도 귀찮은 듯 있는 힘껏 페달을 밟았고 결국 오래지 않아 고독한 그녀 혼자만의 레이스가 되었다.
풍경은 계속 바뀌어 노인들이 운동하는 나루를 지나 시끄러운 소풍이 그득한 곳에서 풀만 살랑거리는 자전거길이 나왔다. 사람들이 밀물처럼 들어왔다 사라졌다 영화 속 파노라마처럼 비현실적으로 달리는 옆구리 옆으로 흘러갔다.
혼자 오롯이 음악을 들으며 누구도 이제는 강요하지 않는데 계속 달린다. 누군가의 경쟁을 위해서 달리는 것도 너무 애써 속도를 내는 것도 그녀의 취향이 아니다.
물론 있는 힘껏 달렸어도 그녀는 혼자였을 것이다.
가지고 있는 힘의 70퍼센트만 쓰라고 누군가는 조언했다. 그래도 문득 백 프로 힘을 다했을 때 어느 정도의 속도가 날지 궁금하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평생 목표를 위해 있는 힘껏 애써 본 적이 없던 그녀였건만 최근에는 백 프로 아이를 위해 놀랄 만한 집중을 하고 있다. 서른을 앞두고 해대던 요란한 카운팅은 간데없이 자신의 나이는 잊고 아이의 나이만을 세고 다. 그녀의 삼십 대는 아이 나이 변화 이상의 의미가 없다. 그런 하루가 계속되던 날들이 꼬리를 물면서 창문 닫힌 방에 갇힌 갑갑함이 출몰하는 횟수가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혼자 달릴 수 있는 시간이 되면 더욱 그런 날들이 선명하다.
지금, 실은 그녀 스스로 도망치듯 낙오된 것인지도 모른다.
100퍼센트 집중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엄마라는 직업에.
타인의 몰이해가 서운했고
자신의 나이는 모르고 아이의 나이로 매해를 보내고 있는
몰입하는 자신이 힘들었다.
그러니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다고 아우성치며 엄마들이 나 찾기를 하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위한 부분을 키워나갔다.
그건 오롯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라는 명함을 가지고도 가능했다.
엄마로 사는 것 외에 나를 위해 몇 퍼센트 떼어내면 이만한 직업은 없다.
누군가를 이렇게 순수하게 백퍼센트 사랑할 수도 없고
나를 이렇게 필요로 하는 사람도 없다.
필수 인력이 된다는 것은 힘들어도 보람찬 일이다.
엄마라는 명함이 사람들에게 인기는 없지만
만족하고 자신감을 충전한다면
맘충이라고 따가운 시선을 주든지 말든지
상관없다.
스스로 자부심을 가지고. 힘들어도 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