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는 중학교 때 과학 소논문 자율동아리에 가입을 했다. 대표 엄마가 소논문을 모아 책을 출판해야 하는데 제발 누가 해주세요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고..난 할 수 있는데...속으로 이야기하다 결국 나서서 저요~ 제가 할게요. 하는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행동을 했다. 그 동아리는 나를 빼고 서로 다 아는 엄마들인 상황이었다. 나서서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이리저리 밤새 구르고 궁리하다 손을 들게 된 것은 그들에게 도움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아주 조금 있었지만, 무엇보다아이가 동아리 차기 대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거라는 계산이 있었다. 누가 등 떠밀지 않아도 앞으로 성큼 나설 수 있는 힘을 주다니. 엄마는 용감하다는 말을 이런 때 쓸 수 있으려는가.
그렇게 21세기 들어오면서 손 놓고 있던 한글 편집 프로그램을 다시 하니 새록새록 기억났고 재미가 있기까지 했다. 어라~ 아직 살아있네. 하며 내친김에 학원 교재 편집하는 아르바이트를 지원해 일을 시작했다. 그 학원은 시간이 흐르며 중등 수학학원을 하나 더 운영하게 되었고 실장 일을 의뢰했다.
그렇게 얼결에 대치동 수학 학원 실장이 되었다. 수포자로 학력고사 원수의 과목이었다. 그런데 대학을 서너 계단 내려앉아 쓰게 한 수학을 다루는 학원에서 실장이라니. 세상의 많은 실장들의 비전문성을 몸소 증명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고 지금까지 대치동 수학학원 실장 일을 계속 하고 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는 말은 정녕 맞다. 나도 모르게 실장일이 철썩 몸에 붙고 배운 일이 되었다. 어색해서 전화 한 통 받으면 절절 기던 사람은 사라지고 잘 몰라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대충 위기를 모면하는 스킬도 늘었다. 쓸데없이 성질을 부리는 엄마들의 신경질적인 언사에도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도 어지간히 생겼다. 다른 일을 하려고 도모하다가도 다시 결국 여기에 있다.
대치동 학원 실장이라고 하면 어머 그 텔레비전에서 보는 그런 사람이신 거예요. 한다.
하지만 나는 극성맞으나 유능하고 입시의 최전선에서 학원 일을 컨트롤하는 그런 사람일 리 만무하다.
사실 경력단절녀 엄마들에게 문턱이 낮아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영역이 이 직업이다.
몇 달 전 모 매머드급 학원의 실장 면접하러 간 적이 있다.
또각또각 저 멀리서 오는 누가 봐도 커리어우먼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걸음걸이로 다가온 부원장은 내가 그동안 해온 실장이라는 세계가 얼마나 따뜻하였으나 좁은 것인지를 1시간 동안 알게 해줬다.
"제가 이 일을 시작한 것은 저희 아이 둘을 드러나지 않은 좋은 선생님들과 연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두 아이의 입시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지요. (아마 의대를 간 모양이다.) 이 직업은 허들이 낮아서 많이들 시작하지만 제대로 하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요. 최근 저희 학원에 한 명이 그만뒀는데 그 사람은 스스로 그만뒀다고 생각하지만 제가 한 달 동안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혀서 그만둔 겁니다. 그것조차 몰랐다는 것이 그 사람의 무능의 증거지요."
그러면서 자신의 다이어리에 빼곡한 그만두었던 실장의 문제점 적은 페이지를 보여줬다. 어라. 뭐야 나한테 왜 이래.
"태움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물병을 제가 저기 놓는 게 맞다고 생각하면 저기 놓아야 해요. 2회 차가 될 때까지 수강료를 안 내면 아이 핸드폰으로 직접 엄마한테 전화해야 합니다. 물론 기분 나쁘게 하면 절대 안 되지요. 수강한다고 하고 안 나타나는 것도 책임져야 해요. 저는 상담 성공률 100퍼센트랍니다. 학원에서 퇴근해도 항상 일이 있으면 대응하고 진심으로 일할 수 있도록 하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아 저는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제 생각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차라리 그런 게 나아요. 한다고 하고 제대로 못 하는 사람들이 문제죠"
그러면서 월급은 220을 주고 그것도 수습 기간에는 덜 준단다.
주 5일이 모자라 집에서도 항시 대기에 저런 마귀 같은 사람한테 시달리는데 실화야? 이건 진정한 착취다. 속으로 미친 거 아니야 라는 말을 하며 한 시간 동안 시달린 후 헤어지는 순간 물어보았다.
"부원장님은 몇 년 이 일을 하셨어요?"
"5년입니다."
짧은 기간 동안 많은 것을 이룬 자의 득의만만한 표정을 뒤로 하고 나온 나는 어찌나 혼이 빠졌던지 차를 거꾸로 타 다음 일정에 늦고 말았다.
친구들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 과장 아니야 하는데 진짜 실화라고 오히려 더욱더 심한 말도 많이 들었지만 다 기억이 안 난다고 하지만 다들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대치학원을 잘 모르는구나. 아 정말 알고 싶지 않아. 이런 세상은.
스카이캐슬을 보면서 어랏 과장이 심하네 저런 거 난 못 봤는데 했던 것은 어쩌면 내가 잘 몰라서일 수도 있다.
처음 대치동에 왔을 때 cms 실장은 내게 그랬지
"잘 모르시지만 대치동 아이들은 초5때부터 달립니다. 지금부터 이러저러한 것을 해야 그때 제대로 달릴 수 있어요."라고 했었지, 그래.
나는 그런 실장 아니어요.
아무래도 여기서 전문가가 되긴 힘들 거 같다. 영재고 팀 수업을 핸들링하는 실장들은 떼돈을 벌고 건물을 산다는데. 나는 적은 돈 받으며 친절하기만 한. 꼭 이걸 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지 않는 그럭저럭 미지근한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비전문적인 실장으로 이곳을 떠나게 될 것이다. 결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