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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 Oct 13. 2024

불면의 밤이 깊어졌다

40대 엄마의 사춘기

   

불쑥 “나의 서사는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된다”란 말을 한다면 누군가는 갱년기냐고 일축하겠지. 하지만 사춘기의 열병처럼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출몰한 이 알 수 없는 감정을 해내야 할 숙제로 받아들으니 다시 소설이 보인다. “30대에 소설을 읽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란 말을 어디선가 주워듣고 마음에 새기며 떠난 지 어림잡아 15년. 그동안 불편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안전했다.     


기는 나의 그런 감상적인 성격이 문제라고 했다. 인생이란 열기구와 같아서 감상을 얼마나 재빨리 버리느냐에 따라 안정된 기류를 탈 수 있다고 아무것도 잃으려 하지 않으면 뭘 얻겠어, 하고 충고했다.

- 김금희 「오직 한사람의 차지」           


소설은 겨우 떼어놓은 지긋지긋하게 감상적인 자아를 뒤흔들 거 같았다. 나는 마악 안정된 열기구에 탄 거 같았기에 가장 먼저 그런 것들을 버려 가벼워지고 싶었다. 누구나의 삶을 입고 전형성 속에 있는 것이 편안했다. 그러다 새벽을 지새우고 한숨이 늘어나며 무언가 어긋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심하기 시작한 시점은 아이도 얼추 크고 나의 시간이 덩어리로 생기면서부터일 것이다. ‘과거를 삼킨 얼굴’이 점점 이기적이고 어딘가 억울하면서도 불안하고 심드렁하면서 진부해졌다. 진부한 것은 참을 수 있지만 스멀스멀 이렇게 사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이 커지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이에 타인의 삶을 엿보며 인생의 본질에 대한 단서를 찾고 싶었다. 언젠가 ‘기적 같은 불행’이 공격하면 맥없이 무너질 일상의 문법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소설과 재회했다.     

순간순간 나의 감정과 고민이 어디서 흘러나오거나 어떻게 표현돼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았다. 이러한 갑갑함을 해소해 주는 열쇠로 잘 쓰여진 소설은 쓸모가 있다. 언어가 생각을 끌어오고 때론 내 행동의 의미를 구체화해 주면서 가져다주는 이 시원함이 반갑다. 그렇게 나의 내면 어디선가에서 불러온 듯한 소설 속 트라우마를 간직한 그들의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아픔에 내 상처를 대어본다. 때론 내 것일 수도 있는 거대한 슬픔 앞에 내던져진 주인공들을 힘껏 진실되게 마주하려 노력하며 나도 모르게 행할 무수한 부끄러운 일들에서 벗어나자 중얼댄다. 내가 만들어갈 서사의 맥락은 스스로 이 세상에서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읽어내면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렇게 누구나의 길을 따라가며 드리워질 헛헛한 눈빛을 피하기 위해 오늘도 나는 소설을 읽는다.       

2019.12


너무 늙어버린 육체 안에 자리 잡은 너무나도 젊은 마음들을 진정시키는 밤이 온다.     

로맹 가리     


다시 찾아온 책과 글이 불면의 밤을 지키면서

끈덕지게 마셔대던 술은 여전히 굳건한 친구였다.

엄마이자 가정주부로서의 나와 오랜 시간 각인된 나 사이에는 묘한 어긋남이 있었다. 그 어긋남은 사랑으로 틈을 메워도 자꾸 벌어졌고 출렁이는 감정은 밤의 나를 가라앉게 했다. 원체 야행성이었지만 잠들지 못하는 시간이 점점 더 늘어났다. 

아침 일곱 시가 되야 겨우 잠이 들곤 했다.

지나 보니 아이의 사춘기의 시기보다 실은 내가 더 사춘기였어.아들에게 사춘기가 꼭 필요했듯 나 역시 한번쯤 겪어내야 했던지도.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뚱멀뚱 그때의 나를 바라보지.


여전히 깨어있는 새벽, 과거가 사라진 자리에 얼핏 미래의 꿈 같은 것들이 스며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면은 계속되나 예전과 같은 색은 아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그냥 잠들지 않은 밤일뿐.

불면이 나를 떠나지 않듯 밤의 친구 술은 놓지 못해.

달라져도, 달라지고 있어도 아직 나는 이전의 나를 손절할 수가 없나보다. 어쩌면 밑줄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을 통과하면 또 달라질지도. 너무 자연스러워 눈치채지 못하면 더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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