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서 십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열개가 넘는 직업을 경험했다.
부동산 투자, 객잔 및 게스트하우스, 한국 식당, 카페, 화장품 샵, 한국어 강사, 산악잡지 기자, 투어 가이드, 방송 코디네이터, 중국 관련 컨설팅, 온라인 유통업, 마케터, 유튜버, 이제는 브런치 작가까지.
정말 원해서 선택한 직업도 있고,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고 있었던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한 시점에 여러 가지 일들을 같이 하고 있었고, 어쩌다 보니 N잡러가 되어 있었다.
위 직업들은 얼핏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지만 모두 하나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그전까지는 해당 분야에서 소비자로 살다가 생산자의 입장으로 스스로의 위치를 변환해 본 것이다.
여행을 좋아해서 다니기만 했지 내가 누군가에게 여행을 추천하거나 같이 동행하는 일은 처음이었다. 코디네이터이자 가이드로서 내가 했던 일은 여행의 ‘가치’를 생산해내는 일이었다.
평생 한국어를 쓰면서 살았지만 한국어를 가르칠 거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한국을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내 모국어는 하나의 ‘상품’이었다. (물론 거의 무료에 가까운 수업료를 받았지만)
불금에 먹었던 수많은 치킨은 작은 시골 동네 친구들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외국 음식’이 되었으며, 라떼(나 때)는 한국에서 라떼가 유행할 때였으므로 카페에서 녹차 라떼, 자색 고구마 라떼 등 새로운 음료를 선보이는 것은 ‘트렌디’했다.
심지어 사보지 않았으면서 팔아본 것도 있다. 스킨, 로션, 비비크림만 쓰고 살아왔으면서 외국인을 상대로 설화수 같은 고가의 기초 화장품을 팔았고, ‘하늘 아래 같은 레드는 없어요’ 같은 멘트를 날리며 색조 화장품을 팔기도 했다.
지금 와서 가장 의아한 것은 그때까지 온라인에서 물건을 구매하기만 했지 물건을 판매해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온라인 쇼핑몰은 지금 내 수입 중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칠순이 넘으신 우리 엄마가 쿠팡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쯤은 인터넷에서 물건을 구매하시는 것 같은데 그때마다 ‘좋은 세상이다’라며 감탄하신다.
요즘 물건을 사기 전에 친구한테 의견을 구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구매후기를 찾아보고, 유튜브 언박싱 영상을 보며, 인스타 해시태그를 검색한다. 오프라인 매장에서 상품을 경험하고, 온라인 매장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이 이제는 미안해하거나 눈치 봐야 하는 일이 아닌 듯싶다.
기술과 시스템의 발전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코로나가 그 변화의 속도를 가속화시켰다는 것에도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비대면이 디폴트인 세상. 그리고 여러 개의 부캐가 자연스러운 세상. 사회적 관계에 따라 집에서는 누군가의 아내이자 엄마로 살다가 출근하면 회사원이 되었다가 주말에는 딸 또는 며느리로 상황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변하기는 했다. 하지만 전에는 하나의 시간과 공간에 주로 하나의 자아가 있었다면 이제는 온라인 공간에서 동시에 여러 개의 캐릭터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고객님들은 쇼핑몰 사장님한테 네이버 톡톡을 보내고, 구독자님들은 유튜버와 좋아요&댓글로 소통하고 있으며, 리장 생활에 대해서 조용히 물어볼 것이 있는 분들은 인스타그램 DM을 보내고, 친구들은 카톡으로 머나먼 타국에 있는 친구의 생사를 확인하고 있다.
저분들이 소통하고 있는 대상은 모두 한 명(=나)이고, 그뿐 아니라 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얼굴과 이름을 노출하지 않은 채 다른 부캐로도 살고 있다.
꼭 어디를 가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그저 ‘모국’이 아닌 ‘외국’에서 잠시 살아보고 싶어서 중국으로 왔는데 코로나가 발생했다. 봉쇄와 격리, 다시 봉쇄와 격리. 내가 살고 있는 윈난성 지역은 코로나의 영향이 가장 적은 지역 중의 하나이지만 출입국시 격리 규정이 너무 까다로워서 쉽게 해외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매일 여러 국가의 사람들, 회사들과 일을 한다.
중국에서 물건을 구매해서 한국에 판매하고, 한국에서 물건을 구매해서 중국에 팔고 있다. 다음 스텝에서는 중국 물건과 한국 물건을 미국, 일본, 동남아에 판매하는 것도 고민하고 있다.
한국의 카카오(브런치)에 글을 쓰고, 미국의 구글(유튜브)에 영상을 올리고, 중국(위챗)에 사진을 올린다. 한국인을 대상으로는 중국 생활 콘텐츠를 만들고, 중국인을 대상으로는 한국 생활 콘텐츠를 만든다.
사진 촬영, 영상 편집 실력 등이 뛰어나서 가능한 일이 아니다. 나의 기술적 모자람을 여러 애플리케이션이 도와주고 있다.
거창한 외국어 실력도 필요 없다. 최근 내 언어 실력보다 번역 프로그램과 인공지능이 더 빨리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이제는 세계를 연결하는 일이 어렵지 않게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해진 듯싶다.
혼자서 저렇게 다양한 일을 하다니 대단하게 보일 수도 있고, 한 가지 일만 잘하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많은 것들에 관심을 갖는지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나 자신이 특별하지 않기 때문에 N잡러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재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한 분야에서 누구보다 뛰어난 최고가 되지 못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나에게 김연아나 조성진 같은 재능이 있었다면 N잡러로 살고 있었을 리 만무하니까.
그저 전문가로서 한평생을 연구하거나 장인 정인을 가지고 몇 대를 이어가는 분들이 이 사회에 필요한 만큼 나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자유롭게 하며 사는 사람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또한 초기에는 생계를 위한 N잡러일뿐이었으나, 이후에는 그것이 내 성향이자 취향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학교 다닐 때 시험기간이 되면 하루에 한 과목씩 완벽하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았지만 나는 한 과목을 한 시간 이상 공부하지 못했다. 집중해서 국어 삼십 분, 집중해서 영어 삼십 분, 집중하는 척하면서 수학 삼십 분, 이렇게 무언가를 자꾸 쪼개야 성과가 더 좋았던 듯싶다.
궁금한 것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지만 금세 싫증내기도 하는 나 같은 사람도 취향에 따라 선택과 실행을 할 수 있는 시대라서 참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