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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dolli Oct 28. 2022

원하던 퇴사를 하고 나니 행복하냐고요?

해외 정착 초기 시절 매년 두세 번씩 한국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나는 마치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장수처럼 의기양양했다. 무용담을 펼쳐놓듯 마구 떠벌였다.

“우와~ 너희들 아직도 회사를 다녀? 대단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는 내가 얼마나 재수 없었을까…)


하지만 자랑질의 내용은 별게 없었다.

“내가 퇴사해봐서 아는데 말이지…” “내가 외국 나가서 살아보니까 말이지…” “나 지금 완전 행복하거든!”

‘행복’이라는 단어에 결기가 넘쳤다. 만국의 노동자여, 퇴사하라! 그리고 행복하라! 내가 선봉에 서리니.


처음엔 무던하게 ‘응 퇴사하니까 좋아’라고 이야기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내 말에 매우 강한 긍정의 어조가 더해졌고, 이때부터였을 것이다. '사실은 내가 행복하지 않은 건 아닐까'라고 의심하고 자문하기 시작했던 것은.


이얏호! 나 퇴사했다!


물론 처음엔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파란 하늘에 떠가는 구름만 바라봐도 기분이 좋은 건 한두 달이고, 한국보다 싼 물가에 감동하며 신나게 노는 일도 반년이면 심드렁해진다(돈도 떨어져 간다).


지금까지 대학 가는 법, 입사하는 법, 회사에서 일 잘하는 법, 이런 공부는 많이 했던 것 같은데 퇴사 후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낯선 외국으로 이민을 가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이곳에 오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참 우습게도 퇴사 후에 처음으로 당황했던 것은 사무용품을 내 돈으로 사 써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그 첫 구매는 말도 잘 안 통하는 중국에서, 게다가 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시골 마을에서 라니. 


또 명함은 얼마나 파댔는지 새로운 일을 벌일 때마다 부지런히 명함을 파서 아직도 집에는 명함이 한가득이다. 중국에서는 명함을 거의 쓰지 않고 웨이신(우리나라 카카오톡과 유사한 플랫폼)을 통해서 서로 연락처를 주고받는 것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쓸 곳은 없었다. 하지만 나를 지켜줄 회사가 없으니 불안했고 대신 명함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 믿는 것 마냥 그렇게 마구 찍어냈다.


출근할 곳이 없다는 것은 참 어색한 일이었다. 지금처럼 재택근무 개념이 보편적으로 도입되기 전이었으니 어디론가 나가야 이 불편함이 사라졌다. 카페나 바로 출근했다.


출근부에 도장 찍... 아니 선 긋고 오던 시절


단순히 먹고사는 일도 생각처럼 만만하지는 않았다. 여행을 좋아했고, 다른 나라의 음식을 먹어보는 것을 좋아했지만 막상 와보니 외국 음식을 삼시세끼 먹는 것은 여행 가서 한두 번 먹어보는 것과는 달랐다. 한 끼는 볶음밥, 한 끼는 햄버거로 몇 달을 연명했다. 기름진 중국 음식에 적응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독한 중국술을 즐기게 되기도 했다.


살 곳도 제대로 정해놓지 않고 캐리어 하나 달랑 들고 넘어왔는데, 친구 소개로 처음 들어갔던 집은 다행히 세탁기, TV, 냉장고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하지만 세탁기는 고장 나서 청바지를 손빨래하면 팔근육이 얼마나 튼튼해지는지를 실험해야 했으며, TV는 백개가 넘는 채널 중에서 두 개만 신호가 잡혔는데 그건 농업 TV와 국방 TV였다. 벼가 쌀이 되는 과정에 대한 지식이 늘어났고 매일 TV에서 만나는 소와 돼지에 대한 나의 일방적 친밀감도 깊어졌다.

국방 TV는 농업 TV보다도 훨씬 지루했지만 가끔 우정의 무대 같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춤과 노래를 만날 수도 있었다. 큰 도움이 되었다. 


냉장고는 있으나 주방은 없었다. 있기는 했으나 음식을 해 먹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다시 계란볶음밥, 빅맥, 계란볶음밥, 치즈버거, 무한 루프가 시작되었다.


인터넷 연결은 아무리 기다려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랜선과 와이파이는 쓸 수 없었지만 괜찮았다. 나에겐 핸드폰이 있었으니까. 한국에서 가져온 내 최신 스마트폰은 현지 통신사에서 2G밖에 지원해주지 않았다. 그래도 당황하지 않았다. 천천히 여유롭게 살겠다며 개의치 않고 버텼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놀리기라도 하듯 그 핸드폰은 한 달 만에 사라졌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마음이 여유로웠다. 사과폰을 너무 갖고 싶어서 몇 달치 월급을 모으고 있었을 누군가에게 작은 기쁨이 되었기를 바라며 쿨하게 마음을 접었다. 나에게는 아직 퇴직금도 넉넉히 남아있지 않은가.

당시 나는 동네방네 자랑할 정도로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다시 돌아갈까 고민할 정도로 불행하지도 않았다. 


이후의 일이 발생하기 전까지 아직은 괜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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