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벌써 저만치 달아나버렸다. 뭐가 그리 급해서 이리도 숨결처럼 사라져 버린 걸까. 사계절 모든 때를 사랑하지만, 그중 한 시기를 꼽아보자면 단연 ‘가을’이 우선으로 떠오른다. 지난한 더위에 시달리다 만난 한 줄기 서늘한 바람에 작은 행복을 맛볼 수 있는 계절이라 그런 걸까. 아이들과 함께 근방 공원에만 나가도 근사한 피크닉이 될 수 있는 호사를 누릴 수 있는 시기여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이 땅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가장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생일이 끼어 있는 계절이어서라는 것이 가장 솔직한 답이 될 수도 있겠다. 이유를 만들자면 열 개, 스무 개도 더 만들 수 있는 가을이 참 좋다. 달아나는 가을을 야속해 하다가 문득 생일날 다짐했던 한 가지가 떠올라 기록으로 남기고 싶다.
9월, 어느 느지막한 날에 태어났다. 계해(癸亥)년, 돼지띠가 된 해에 덥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 가장 한가로운 오후 2시경에 태어났다고 어른들은 내 사주가 필시 어디 가서 굶지는 않을 호강할 팔자라고들 했다. 운명론에 기댄 것 같은 ‘사주팔자’를 믿지 않지만, 좋은 날에 태어났다는 것에 늘 감사했다.
조용한 내 카톡이 꽤 여러 번 울려대는, 일 년에 몇 안 되는 날이다. 가족들, 가깝게 지내는 지인들, 늘 그리움만 가득한 채 자주 보지 못하는 학창 시절 친구들, 아이 친구 엄마들, 이런저런 목적으로 한 단톡방에 묶여있는 그룹원들은 카톡에 뜨는 생일 알림을 보고 축하 인사를 건네주었다. 그저 고마운 일이다. 그 "축하해" 한마디가 "지금껏 잘 살아왔네" 하는 위로와 격려처럼 다가왔다. 그 한마디면 될 것을 한 문장으로 민망하여 이런저런 선물들도 함께 보내왔다. 진심으로 받기에 손이 부끄러웠다.
이런 내 마음을 토로하자 초현실적인 내 옆지기는
" 자기가 많이 줬으니 그만큼 받는 것이겠지." 하면서 기브엔 테이크일 뿐이라며 과하게 송구스러워하는 나의 민망함을 깨뜨렸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우연히 카톡 프로필을 보다가 생일이라고 뜬 지인들을 보면 한참을 고민하곤 한다. '일 년에 단 하루, 주인공이 되는 날에 축하 인사를 하고 싶다.'라는 순수한 마음으로 인사를 건네고 그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의 선물을 고르고 골라 전송한다. 한사코 그때 내 마음에 '훗날 내게도 돌아오겠지.' 하는 불순한 의도는 없다. 오히려 그런 마음이 들게 할까 봐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선물을 고르곤 했다. 그런데 받았으니 또 모른 척할 수 없는 게 인간사의 인지상정인 법. 나도 선물을 받은 지인의 기념일을 그냥 넘어갈 수 없어 순수하지 않은 마음, 그저 보답으로 선물을 준 적이 있다는 걸 부인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게 끝나지 않는 도돌이표 같아서 언제부터가 순수했고, 어디서부터가 그저 보답의 의미로 건넨 선물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결국, 생일 당일에 마음을 먹은 것은 '내년에는 카톡 생일 알림 서비스를 꺼둬야겠다'는 것이었다. 알림을 보지 않는다면 내 생일을 기억하는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나 또한 알림을 보지 않고 기억하는 지인의 생일은 몇이나 될까를 생각해보면 가족들 이외는 정말 친한 친구들 몇 이외는 떠오르지 않는다.
나부터 카톡으로 생일 선물 보내기는 앞으로 그만하려고 한다. 카톡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선물을 할 수 있는 길이 많을 터인데 너무 간편하게 기념일을 치하해버린 것은 아닌가 싶다. 단, 아무 날도 아닌데 그 사람이 떠오른 날, 문득 그리움이 차오른 날, 그를 생각하며 선물하기를 이용하려고 한다. 당장 사랑하는 이들의 생일을 다이어리에 옮겨 적는 일부터 했다. 이 작은 수고로움으로 나의 결심의 시작을 선서하듯.
관계에 있어 순도 백 프로 순수함으로 맺어지는 게 과연 가능하냐는 반문도 생긴다. 그럼에도 1%라도 더 순전한 마음으로 한 사람을 대하고 싶다. 인생을 뭘 그리 복잡하게 생각하고 사냐고 말하는 이들이 있을 수도 있다. 굳이 그 모든 행위들 하나에 ‘의도’와 ‘의미’를 파악하며 사는 것은 너무도 피곤한 일 아니냐면서 말이다.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생일을 챙겨주고 싶었고, 자주 보지 못하는 시대에 간편하게 ‘카카오톡 선물하기’를 이용해서 선물을 주는 것은 그저 효용성과 편리성으로 이루어지는 일이지, 그것에 불순한 의도가 낄 수는 없는 것이라고. 때로는 이리도 복잡한 내가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나를 인정하며 그렇게 결심을 한 나 자신을 보듬어주기로 했다. 삼십 대의 마지막 생일을 맞이하던 그날, 나 자신의 생각과 결심을 쿨하게 인정해주자는 선물을 스스로에게 건네주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