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은 조율하다.
지난주는 베트남 나트랑으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한해의 전반전에서 후반전으로 나아가는 시점에 시기적절한 휴가였지 싶다. 학기 중에 수업을 빠지는 것을 몹시 부담스러워했던 큰아이도 여름휴가를 왜 지금 가냐고 처음에는 볼멘소리했지만, 여행을 떠나서는 내내 '좋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으니 이만하면 모두가 만족스러웠던 여행이었던 것 같다.
해외여행을 떠난 것이 몇 년 만인지도 모르겠다. 건널 수 없던 코로나의 강이 길게 뻗어 있던 시절이 벌써 아득하다. 그때 이후로는 아이들과 처음 떠난 해외여행이었다.
좋아하는 음식, 과자는 질리도록 하나만 파는 나와는 다르게 남편은 이런저런 음식과 메뉴를 탐색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난 한번 다녀왔던 곳이 좋으면 특별한 변수로 불안하지 않을 그곳을 다시 가는 것을 선호하지만 남편은 낯선 곳에 가보는 것에 늘 로망이 있다. 남편의 취향에도 불구하고 여행지를 선택할 때는 늘 나의 의견을 존중해 줬던 것 같다. 물론 경제적 여건으로 선택지가 제한적이었던 것이 큰 이유이기도 하지만. 큰아이만 있었을 때 첫 가족 여행으로 갔던 괌이 너무 좋아서 둘째를 낳고 한 번 더 갔더랬다. 둘째가 물놀이를 맘껏 즐길 수 있을 때 갔던 베트남 다낭이 좋았던 기억이 있어서 이번에는 베트남 나트랑을 휴가지로 선정했다.
기간이 길지도 않았고, 한번 다녀온 베트남에는 특별한 관광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이번에는 리조트도 한 곳으로만 결정했다. 여행을 준비할 때 참 꼼꼼하게 이곳저곳을 비교하며 야무지게 준비하는 이들을 보며 감탄할 때가 많다. 일 년 소비 중 가장 큰 지출이 나가는 것이고, 낯선 여행지에서 가족이 일주일이나 묵어야 하는 것이니 잘 준비해야 하는 것이 맞지만 난 이상하게 여행 준비는 늘 느슨하게 하게 된다. 빽빽한 계획으로 인해 더 기발한 재미와 즐거움이 들어오지 못할까 봐 얼기설기 대충 준비해서 떠나는 여행을 선호하게 되는 것 같다. 이번에도 여행지만 정하고 나서는 비행기와 숙소가 묶여있는 에어텔 프로모션을 몇 군데 비교한 후, 크게 고민하지 않고 처음 생각했던 곳으로 예약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가족에게 딱 맞춤 숙소였고, 5일 내내 모두가 만족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트랑은 공항이 있는 깜란 지역과 나트랑 시내 지역으로 크게 나뉜다. 다양한 호텔과 리조트, 맛집이 즐비한 곳이 시내이고 깜란은 상대적으로 조용하지만 큰 규모의 리조트가 해안가를 따라 쭉 이어져 있다. 최신 지어진 리조트는 규모며 시설이 화려하고 좋았지만 당연히 비쌌고, 우리는 연식은 오래됐지만 지난 다낭 여행에서 만족스러웠던 빈펄 리조트를 골랐다. 이번에는 호텔 레지던스 형태가 아닌 풀빌라로 단독 빌라에 우리 가족이 함께 놀 수 있는 넉넉한 수영장이 딸린 곳이었다. 리조트 내 메인 풀도 좋았지만 아이들은 발코니에서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개인 풀장에서 마음껏 수영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고 했다. 나와 남편도 밤늦도록 마음껏 수영할 수 있어 말 그대로 자유로이 유영했다.
수영 다음으로 모두가 좋았다고 말한 것은 실컷 먹은 '과일'이었다. 베트남으로 여행을 가야 하는 이유를 한 가지만 꼽으라고 한다면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저렴한 가격에 온갖 열대 과일을 원 없이 먹을 수 있다고 말하겠다. 동남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에는 망고가 너무 질려서 노란 것은 쳐다도 보기 싫다고 배부른 농담을 하곤 하는데 우리 가족에게 이번 여행은 망고보다 망고스틴과 사랑에 빠지는 시간이었다. 한국 뷔페에서 가끔 먹을 수 있었던 냉동 망고스틴은 맛이 없어서 천덕꾸러기 메뉴였던 것 같은데, 나트랑에서 먹은 생 망고스틴을 맛보고는 '세상에 이런 맛이!'란 감탄이 절로 나왔다. 아이들도 망고스틴 맛을 본 이후로는 다른 과일은 후순위로 밀리고 계속 망고스틴만 주문했다.
수영, 과일, 조식, 그리고 이번에 두 딸과 즐겼던 것은 '마사지'였다. 이제는 엄마와 나란히 누워서 마사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큰 아이들을 보며 새삼 꼬꼬마 아이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아이들과 딱 붙어서 위험한 일이 생길까 전전긍긍하며 보냈던 그 시절들이 어느새 훅 지나고 이제는 함께 누워 마사지를 받는 숙녀들로 자란 것을 보며 시간이 통째로 순삭 당한 느낌이었다. 마사지는 싫다는 남편을 뒤로하고 아이들과 1일 1 마사지를 받고 돌아오며 어디는 아팠고, 어디는 시원했다고 수다를 떠는 그 시간이 참 좋았다. 햇빛이 너무 뜨거워 수영조차 위험하다 싶을 때는 각자 보고 싶은 영상을 보거나 책을 보면서 한가로이 보냈다. 보고 싶었던 소설을 실컷 봤던 시간이 나에게는 진정한 쉼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일상의 루틴이 서서히 무너지고 새로운 곳에서 몸과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 일정으로 보내는 휴가 시간이 좋으면서도 내심 불안함이 불쑥 솟기도 했다. 다시 돌아가서 아이들이 잘 적응할지도 걱정됐고, 제한 없이 먹고 운동도 하지 않고 보내는 것이 불안했고, 돌아가면 써야 할 글들을 잘 쓸 수 있을지 두려웠고, 무엇보다 이런 호사를 이렇게 누려도 되는지 하는 이상한 죄책감이 밀려올 때도 있었다. 이런저런 무수한 감정들을 여과 없이 마주하고 왜 그런 감정이 드는 것인지 찬찬히 생각해 보는 것 또한 휴가의 묘미가 아닐까 싶었다. 애써 그런 감정들을 숨기거나 무시하지 않고 조우하며 내가 평소에 이런 마음으로 살았구나, 아이들에게 이런 기대를 하고 있었구나를 곱씹었다. 마음과 몸을 열어 모든 순간을 있는 그대로 충분히 누릴 수 있던 시간이었다.
흘려보내야 할 것은 먼 타국땅에 훌훌 버리고, 언제라도 꼭 붙잡고 있어야 하는 것은 꽉 붙잡아야지 하면서 실제로 그래보려고 애썼다. 마땅히 내야 하는 소리를 내지 않고 엉뚱한 음으로 이탈하는 악기를 조율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게 일주일의 휴가는 그렇게 조율하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에 거리낌 없이 감사로 기뻐하며, 놓치고 있던 것은 다시 붙잡고 마음을 새롭게 하는 시간. 무엇보다 서로가 더 깊이 사랑하고 애틋해하자고 몸짓과 눈짓으로 다짐했던 시간들.
다시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됐고, 월요일이다.
분명 한껏 쉬고 왔는데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피곤한 것이 이상하지만, 새롭게 조율된 나로 새 날을 시작해 본다. 올해의 남은 반절도 그것이 무엇이든 아낌없이 나의 시간을 잘 사용해 보자고 다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