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행성 참 이상하다, 그치?
이 기록은 나의 첫 장기 심리상담에 대한 수기가 될 예정이다. 그런데 어째서 수기의 제목에 '페리도트'가 들어갔는지를 먼저 소개하고 싶다.
혹시 '스티븐 유니버스'라는 애니메이션을 아는지 모르겠다. 모르는 분을 위해 스토리를 설명하면 이렇다. 온 우주의 식민지로부터 광물 자원을 착취해 행성에 구멍을 숭숭 뚫어버리는 '젬'이라는 종족이 있다. 그들은 지구 또한 에멘탈 치즈 꼴로 만들려 하는데, 현장에 파견된 일부 젬이 지구 생태계에 매혹된다. 그리하여 그린벨트를 지정하려는 환경단체와 재개발을 강행하려는 기업가들의 사투가 이 애니의 핵심 갈등이 되겠다. 사랑과 평화, 생명과 존중의 가치를 그려낸 수작이니 기회가 닿으면 꼭 보셨으면 한다.
아무튼, 이 젬(gem)이라는 종족은 영어 철자에서 엿보이듯 보석을 본체로 한다. 그래서 각 인물의 이름도 보석을 따라간다. 가넷, 펄, 애머티스트 등. 그 반짝이는 인물들 중에서 나는 페리도트를 좋아했다. 작은 체구에 삼각형 머리(스티븐의 표현에 따르면 '화난 파이조각 같은'), 동그랗지만 시시때때로 뾰족해지는 눈이 무척 깜찍한 젬이다.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라는 상사에게 돌대가리라고 욕하고 명령에 불복하는 패기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가 페리도트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그 영웅적인 명령불복종 때문이 아닌, 불복 직후에 보인 모습 때문이었다. 그의 의연한 태도를 두 컷으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으아아 내가 미쳤지ㅠㅠ'와 '야호! 내가 미쳤네!'를 오가는 모습이 너무 귀엽더라.
그땐 몰랐다. 내가 분노와 환희와 좌절과 기쁨과 슬픔의 소용돌이 속에서 페리도트를 떠올리게 될 줄. 붕괴한 페리도트를 보며 깔깔대던 나 자신을 깊이 반성하게 될 줄은.....
미리 말해둘 것이 있다. 나는 가정폭력이나 성적 학대와 같은 강렬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지 않으며, 주변 지인들에게 단단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들으며 삼십 년을 살아왔다. 내가 심리상담을 받게 된 계기는 이른 나이에 진단 받은 갑상선암, 그리고 암의 원인이 된 스트레스를 진단하고 해소하기 위함이었다. 때때로 튀어나오는 회피 성향을 고쳐 더 유능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그런데 상담 5회 만에 나는 목표를 전면 수정해야 했다. 내가 문제라 생각했던 건 문제가 아니었다. 암이나 스트레스는 부산물일 뿐이었다. 나를 키운 환경 속에서 내가 키운 정신 세계의 부산물.
내가 걸어온 시간을 재해석해야 한다고 느꼈을 때, 나는 발 딛고 선 행성을 재정의해야 했던, 작고 용감하고 소심한 녹색 보석을 떠올렸다. 페리도트는 자신의 멘탈 붕괴 상태를 생중계로 녹음기에 담아 로그를 붙였다. 어떤 마음으로 그랬을까. 추측컨대 그는 자신의 상태를 거리를 두고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이다. 녹음한 내용을 들으면 확신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게 아닐까. 내가 미친 건지, 아님 지금껏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의 깨달음을 얻은 건지.
그래서 나도 그를 따라 상담일지를 써보기로 했다. 그래서 이 일지의 제목이 '페리도트 상담일지'다. 속뜻을 해석하면, '매주 실시간으로 미쳐가는 사람의 마음 관찰기'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쓰면서도 의구심이 든다. 상담 이후 시작된 모든 고통과 번뇌가 내 망상에 부풀려진 허상은 아닐까? 내가 나도 모르게 소설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상담 받기 전까지 아무 문제도 없었는데 이렇게 감자 캐듯이 줄줄이 엮여 나온다고? 근데 왜 눈물이 안 멈추는 거지? 주변 사람들, 가족과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한다. 너 이런 사람 아니었잖아. 요즘 너무 예민해. 감정적이야.('상담사가 신천지 소속 아니냐'는 말까지 들었다. 만약 상담사가 수상한 종교를 권할 시, 추가 피해자를 막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경험을 남김없이 기록할 것을 엄숙히 선서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게 흥미로운 소재를 얻은 뇌가 써내려간 시나리오라 하더라도, 고통은 엄연히 실존한다. 진실로 중요하고 간절하게 해결하고 싶다. 그러니 진지하게 풀어보려 한다. 그리고 내가 심각하건 말건, 이 글을 볼 당신은 그냥 재밌게 읽어주면 좋겠다. 내가 페리도트를 보고 깔깔댔던 것처럼. 그리하여 언젠가 이런 당혹스러운 사태에 처하게 되거든, 스스로를 귀엽고 가엽게 여기주길 바란다.
'그래. 이 행성 참 이상하다, 그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