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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슴도치 Jul 10. 2024

곰스크로 가는 기차

해석


"삶,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슬픈 기차여행"



책 뒷면에 적혀있는 말이다. 그렇다. 삶은 곰스크, 즉 이상향이라는 종착점을 향해 가는 기차여행이다. 하지만 숱한 현실적 제약 속에서 우리는 주인공처럼 종착점까지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역에 멈춰서게 된다. 현실적 제약은 가족의 행복과 평안, 돈, 아이, 예측 가능한 안정적인 미래 등 다양한 형태로 찾아온다. 누군가는 이것들을 진정한 자신을 찾아가는 여행을 방해하는 유혹으로 여기며 떨쳐낼 것을 분부한다. 모든 현실적 관계를 잘라내고 곰스크를 향해 자신을 내던지는 것이 진짜 나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나는 불완전한, 무언가가 결핍된 나다. 이것이 주인공의 철학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여러 번 곰스크로 갈 기회를 포기한다. 한 번은 중간역에서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아내의 모습에 사랑스러움을 느껴서, 또 한 번은 아내가 아이를 뱄기 때문에 그랬다. 주인공의 철학은 순수하게 독립적인 자아를 요구했지만 현실 속의 자아는 수없이 많은 연고와 연결망에 둘러싸여 있었다. 고뇌 끝에 그는 현실을 선택하고 만다. 


우리 모두는 현실이라는 출발점과 이상이라는 종착점 사이에 놓인 철로에서 기차여행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크게 두 종류, 비범한 사람과 평범한 사람으로 나뉜다. 비범한 사람들은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종착지를 향해 자신을 밀어붙인다. 돈, 친구, 심지어는 가족까지 내려놓는다. 오직 소수만이 비범해질 수 있다. 평범한 사람들은 출발점에 안주하거나, 비범한 사람으로의 여행을 하는 도중에 결국 중간역에서 내리고 만다. 절대다수가 여기에 속한다.


오르트만은 두 종류의 사람 간에 우열을 논하지 않지만 평범한 사람들, 특히 비범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평범한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피할 수 없는 절절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전임 교사와 평범한 삶을 택한 주인공을 통해 보여준다. 전임 교사는 비범한 삶뿐만 아니라 평범한 삶도 우리가 선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삶이며, 현실적 제약이 있었지만 결국 우리 자신이 그것을 선택한 이상 후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은 기쁘고 반은 슬픈,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그의 눈빛에서 우리는 숨겨지지 않는 고통을 포착한다. 둘째가 태어나자 곰스크로의 여행이 생전에 이뤄지기 어려움을 직감하고 이를 수용한 주인공. 그러나 그는 말한다. 오늘까지도 곰스크는 그를 사로잡는다고. 책은 곰스크를 포기했지만 완전히 놓아버릴 수는 없는 곰스크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는 그의 혼잣말로 끝이 난다.



오늘까지도 여전히 그것은 나를 사로잡는다. 곰스크로 가는 특급열차가 저 멀리 돌진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 찢어지는 듯 슬픈 기적소리가 초원을 뚫고 울리다가 멀리 사라질 때면, 갑자기 뭔가 고통스러운 것이 솟구쳐 나는 쓸쓸한 심연의 가장자리에 놓인 것처럼 잠시 서 있곤 한다. 그러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말없이 아내와 아이들 곁을 지나쳐 내 전임자가 죽을 때까지 묵었던 바로 그 다락방으로 올라간다. 나는 문을 잠그고  침대에 몸을 던진 채 그 나머지 시간을 누구하고도 말하지 않고 숨어서 보내곤 하는 것이다.


작가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곰스크를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니까, 포기해도 엄청난 고통이 밀려올 거니까 곰스크를 향한 기차여행을 완주하라는 것일까. 그렇게 보면 후회하지 말라는 전임 교사의 메시지를 이해할 수 없다. 거꾸로 곰스크 대신 주어진 소중한 환경을 지키고 일상을 향유하라는 것이 작가의 주제의식이었다면 책의 마지막 부분이 수수께끼로 남는다. 작가는 어떤 삶을 선택해도 찾아올 수밖에 없는 후회와 회한을 안고 살아가는 인간의 실존적 운명을 포착하고 그에 대한 나름의 위로를 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작가는 언젠가 우리는 곰스크를 잊게 되어 고통이 사라진다고 위로하지 않는다. 다만 이것은 우리 모두가 겪는 보편적인 고통이자 운명이라는 점을 자각하게 한다. 심지 비범한 사람도 곰스크를 위해 자신이 놓친 많은 소중한 것들에 대해 일생 후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 사실에 대한 앎이 고통을 소각시키지는 못한다. 그러나 적어도 정화제가 되어 우리네 삶을 살아가게 만든다.



끝으로 황경신 작가의 서평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을 통해 포스팅을 갈무리한다.


"내가 최초로 곰스크를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이십대의 벼랑에 매달려 있었다. 겁도 없이 곰스크, 라고 발음하며 조금은 짖궃은 마음으로 타인의 표정을 살피던 시절이었다. 누구는 곰스크를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라 했고 누구는 말하지 못한 꿈이라 했으며 또 누구는 아무말 없이 슬픈 미소를 지었지만, 곰스크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내게 곰스크는 곰스크 그 자체인 동시에 현재진행형으로 달려가는 기차였고 거대한 물음표였다. 수시로 행방불명이었으나 삶의 난폭한 구절마다 기적소리를 내며 달려오곤 했다. 어두운 다락방에 숨어 또다시 멀어지는 기차를 바라보며 나는 생각한다. 발목을 잡는 건 행복해지려고, 쵝소한 불행해지진 않으려고 시작한 일들이었다고. 그리고 상처가 되는 건 아마도 사랑이나 꿈이 저지른 짓들이리라." 


_ 황경신(작가)


-가지 않은 길-



프로스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원제 Reise nach Gomsk는 곰스크로 가는 '여행'이다. 역자는 이를 곰스크로 가는 기차로 옮겼는데 원제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면서도 소설의 내용을 잘 담아내기에  더 좋은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 글 곳곳에서 등장하는 불안, 본래의 존재(나)와 같은 표현은 하이데거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 프리츠 오르트만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정보가 많지 않지만 하이데거와 동시대에 산 독일인이고 박사학위를 받은 고학력자임을 감안하면 그가 하이데거를 몰랐다고 보기엔 어려울 것 같다.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하이데거가 요구하는 본래적 존재로의 기투에 반기를 든다. 일상에 안주하며 현실을 향유하는 비본래적 존재로 살더라도 괜찮다고 말한다.


*** 황경신 작가의 서평은 실로 명문이다. 그의 문장 곳곳 여기저기에 주해를 덧붙이고 싶은 충동이 일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더 큰 여운과 감동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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