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사랑할 때 감춰야 하는 마음들
열차가 7호선 고속터미널역에 도착했다. 촘촘하게 자리 잡고 있던 승객들이 일제히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는데, 그 광경은 마치 어제 본 전쟁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드넓은 대지에 십만 대군이 일자 대형을 갖추고 있다 말 위에 올라탄 장군이 ‘진격!’을 외치는 순간 큰 기합과 함께 죽음 속으로 뛰어가는 병사들을 보는 듯 했다. ‘저 중에서 몇 명은 반드시 지각하게 되겠지.’ 급할 게 없었던 나는 뒤로 빠져 병사들의 생존여부를 예측하며 놀았다. 눈빛과 걸음걸이를 통해서 말이다.
7호선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려면 에스컬레이터를 두 번 타게 되는데, 첫 번째 에스컬레이터를 밟고 올라갔을 때, 한 연인이 심각한 얼굴로 다투고 있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장소를 잊은 듯 했고, 곧이어 남자도 지지 않으려는 듯 언성을 높였다. 출근하던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걸었고,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원이 그려졌다. 경계 안으로 침범하면 감전이라도 되는 듯이 사람들은 두 사람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원을 그리며 걸었고, 이번엔 나도 그 행렬에 동참하게 되었다. 거기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했겠지만,
무슨 이유로 좁은 환승구간에서 저렇게나 싸우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궁금증을 해소하지 못한 채 갈 길 가던 내 등 뒤로 여자의 목소리가 좀 전과는 달리 가장 낮고 싸늘하게 들려왔다. “그냥 헤어지자.”
아니 헤어질 때 헤어지더라도 ‘그냥 헤어지자’는 건 무슨 말인가. 헤어지는 데 이유가 없다는 건지 아니면 당신과 말하기도 지쳤다는 뜻인지 나는 오전 내내 그 의미를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며 생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두 사람은 헤어지는 게 좋겠어!’
말은 중요하다. 입 밖으로 나온 말에 감정이 끌려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말과 감정은 꼬리잡기 게임과 같아서 서로에게 물고 물린다. 홧김에 헤어지자는 말을 뱉어놓고, 친구에게 상황을 설명할 때는 ‘시간을 갖기로 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본심을 헤아리기 어렵다.
모든 사람은 간사하다. 단지 그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만 있을 뿐이다. 그녀의 마음은 이랬다. 홧김에 헤어지자고 말은 뱉었지만, 정말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남자친구의 표정이 너무 심각해져 버렸다는 것. 여자는 남자친구를 그 자리에 세워놓고 뒤돌아 걷겠지만, 한동안 미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말을 너무 심하게 했나?’ 하지만 미안한 마음도 잠시 뿐이다. 연인에게 계속 미안한 마음을 가지면, 나쁜 사람은 본인이 된다. 그리고 우린 이 옹졸한 마음을 인정하지 못한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화를 내는 거다. 남자를 더욱 미워하게 된다. 처음부터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이젠 진심으로 헤어지려고 마음먹는 거다. 이유는 하나. 내가 나쁜 사람이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진심이 있는 그대로 인정받기 힘든 세상이다. 진심은 언제나 약점으로 작용할 뿐. 그래서 숨기는 거다.
좀 잔혹한 얘기 하나를 꺼내야겠다. 몇 일전, 헌 책방을 뒤지다 전쟁심리에 관한 서적 한권을 발견하게 되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전쟁 중에 군인들은 간혹 죄 없는 농부들을 기관총으로 죽이곤 했는데, 그 이유가 동료들에게 약해보이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실제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던 한 용사의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그의 전언이 다음과 같다. “총에 맞고 다치는 것보다 동료들한테 겁쟁이라고 놀림 받을까봐 더 두려웠다.” 간사한 마음이 한 사람을 얼마만큼 어둠으로 물들일 수 있는지 나는 섬뜩했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도 마찬가지. 헤어지자는 말을 습관적으로 뱉는 사람이, 그 사람과 계속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해나갈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해서 이젠 답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한동안 괜찮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떠난다. 떠나면서 갖은 불만을 토해내겠지만, 본심은 스스로 나쁜 사람이 되기 싫어서 떠나는 거다. 그렇게 가장 이기적인 방식으로 두 사람에게 이별이 찾아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