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 사랑할 때 감춰야 하는 마음들
그녀가 거울 앞에 서있다. 두 시간 만에 맘에 드는 원피스를 발견한 거다. 옷걸이에 걸린 하늘하늘한 그것을, 힘껏 들어 올려 자신의 어깨라인에 맞추고는 이리저리 돌려가며 그 날의 자신을 상상한다. 별안간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뾰로퉁한 표정을 짓는다. 남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헐겁게 꽁지를 잡고 묻는다. “단발 어때?” 씩 웃으며 그녀가 말했다.
여성에게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단발병처럼, 이유 없이 그러고 싶고 그렇게 되는 날이 있다. 유달리 밥이 퍽퍽하고, 투샷 넣은 커피에도 잠이 깨지 않는 날. 월급이 깎였다거나, 누구한테 잔뜩 혼이 난 것도 아닌데, 한숨 잦은 날. 그런 날이 당신이 구축한 세계에도 존재하고, 내가 가꾸는 마음에도 존재한다. 나는 이 이름 없는 마음의 출처가 궁금했다. 하루 종일 그 생각으로 복잡했던 날에 만난 친구의 이야기에서 질문의 답을 어림짐작할 수 있었다.
그날의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여자인 친구는, 3년째 만나고 있는 자신의 남자친구를 ‘아주 소나타 같은 남자’로 표현했다.(실제로 남자는 그 차를 만드는 회사에 근무하고 있었다.) 테이블에 둘러앉은 우리는 일제히 눈을 맞추고 웃어젖혔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외모, 경제력, 성품 모든 것이 부족하지 않지만 어디 하나 두드러진 특성이랄게 없어서, 남은 70년을 같이 산다고 하면 지루해서 못 살겠다는 거다. 옆에 앉은 형은 배가 불렀다 했고, 그 옆에 앉은 “형은 그래도 준중형이잖아” 자조적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또 다른 친구의 얘기다. 그와 나는 대학생활을 함께 보냈지만, 졸업과 동시에 등을 돌린 자석이 되었다. 나는 글을 썼고, 그는 취업을 했다. 나는 비정규직이었고, 그는 정규직이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 공통점이 많다고 느끼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확연히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투영한다. 그는 인사고가에 대해 이야기 하고, 어제 만난 본사 임원에 대해 얘기하지만, 리액션 할 수 있는 소재가 내게는 없다.
그가 차를 사고 싶다고 했다. 아반떼는 좀 그렇고, 이왕이면 소나타로 사고 싶다는 거다. 회사에 가서 그 말을 했더니, 선배들이 전부 만류하더라는 얘기다. 이유인 즉, 첫 차를 소나타로 사버리면 나중에 차를 바꾸고 싶어도 명분이 없다는 거다. 침대에 누우면 그랜저가 아른아른 하는 때가 오지만, 소나타는 어디 고장 난데 없이 무난하게 동작하기 때문에 와이프한테 차 바꾼다는 말을 꺼내지 못해 속앓이 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사랑도 소나타처럼 하는 건 아닌지 궁금했다.
무난하다는 말이 주는 안정감을 자주 의심한다. 사람은 안정되었다고 느끼는 때, 자꾸만 그 자리에 고이려고 한다. 형태 없이 흘러가는 것들을 두려워하고, 그런 성질의 사람을 프레임 속에 가두려고 한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을 내세웠던 침대에 누워, 나는 정말 흔들리지 않아서 편한 건지, 광고로 인한 현혹인지 한참을 생각했다. 그 브랜드 침대가 내 방에도 있고 부모님 댁에도 있다. 차이가 있다면 내 건 올해, 부모님 댁에 있는 건 20년 전에 샀다는 것 정도. 명절에 내려가면 나는 오래된 침대에 누워 낮잠을 청하곤 하는데, 올해 마련한 내 것과 비교해도 푹신함의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나는 침대에게 묻는다. “침대가 과학이 맞아?” 그러면 침대가 이렇게 답을 하는 것만 같다. “이만하면 됐지. 뭘 더 바래.”
장마 같은 한 철을 보내고 헤어진 여자가 있다. 여자는 남자를 믿지 못했고, 남자는 자주 외도 했다. 둘은 자주 다투었다. 낡은 술집, 붉은 조명 아래서 여자는 연거푸 잔을 비웠다. 이제는 그만 안정된 사랑을 하고 싶다면서 말이다. 힘들어 보였지만, 위로 하지 않았다. 1년 전, 같은 술집, 같은 장소, 같은 안주를 먹으며 같은 이야기를 한 것을 그녀만 모르는 모양이었다.
그녀는 소나타 같은 남자를 찾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본인이 너무 낡은 소나타라는 것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나쁜 습관으로 엔진이 자주 고장 났고, 길가에서 시동이 툭툭 꺼졌다. 그때마다 조수석에 타고 있는 연인을 의심했고, 그 의심은 잔고장의 원인이 되었다. 그녀의 사랑이 매번 실패하는 것은 상대를 몰랐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몰랐기 때문이다. 이번 사랑이 끝나고 나는 그녀가 자기를 조금 더 사랑하길 바랐다.
흔히 문학에서 시간의 흐름을 강물이 흘러가는 것에 자주 비교하곤 하는데, 나는 강과 시간의 ‘흐른다’는 공통 속성보다, 그 흐름을 타고 떠내려 온 것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강과 시간 앞에서 그대로 흘려보낼 것들과 건저내야 할 것들을 구분해야 한다. 상처는 이만 흘려보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