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F층 창가 앞 - 새로 떠오르는 붉은 노을처럼.

#울산 #부산 #청주 #김포 #서울 #희망 #시작

by 별하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우리 가자
걱정은 잠시 내려놓고
대신 가볍게 짐을 챙기자
실컷 웃고 다시 돌아오자
거기서는 우리 아무 생각 말자
너랑 있을게 이렇게


(노래 : 도망가자. 가수 : 선우정아)






나흘 (울산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사환으로 일을 했던 대학교의 학생과, 그리고 같은 대학교 인쇄소에서 일을 했던 상업고등학교를 다니는 동갑내기 여고생, 우리는 이렇게 만나 just friend가 되었다.

“야 이것 몇 년만이냐, 그래도 가끔 전화로 안부 묻고 그래서 그런가, 놀랍지는 않고 그냥 반갑네”

“야 너도 세월을 비켜가지는 못했네, 많이 늙었다야”

“지랄하고 있네, 지도 늙었으면서”

“울산에서 산지 오래되었다고, 울산 사투리 쓰네 이제”

“그래도 전라도 집에 가믄 바로 전라도 사투리 나와야”

서로 안부가 궁금했다. 현재 여사친은 남편과 사이가 그리 행복하지 않아 윈도우 부부처럼 지내고는 있지만 이혼은 하지 않는단다. 그냥 각자의 집에서 각자 살고 있다고, 서로 간섭하지 않으면서, 자신보다는 큰 딸의 앞길 막을까 봐 그렇게 결정했단다. 조선시대 사고방식의 전형적인 어머니의 마인드 컨트롤 장비를 가슴에 장착하고 살아가는 여사친.

여사친은 2020년 도쿄 올림픽 양궁장에서 자랑스러운 금메달을 쟁취한 어느 선수의 엄마이기도 하다. 10대 때부터 운동신경이 있었던 여사친이다. 고등학교 다닐 때 배구한다고 깝죽대고 다니기도 했고,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서 한때 에어로빅 붐이 불 때, 강사 한다고 교육도 받고 에어로빅 강사로 활동도 했던 친구다. 그래서 목소리가 한때는 걸걸걸 하고 돌아다녔다. 꼭 변성기 남자 목소리로,


2017년에 인천 송도에서 비치발리볼 대회를 한 적이 있다. 이때 울산 대표로 올라왔다고 해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나름 국가대표 선수들처럼 비키니는 아닌 것 같은데 유사한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뭐야 남잔데,


“야 너 배구팀 아냐”

“그렇지 배구팀이지, 그런데 비치발리볼도 똑같어, 그래서 괜찮다고 해서 우리 팀이 대표로 올라왔지”

“비치발리볼에 대한 환상이 깨져브렀다

“염병, 이거나 처먹어”


울산시 대표팀으로 올라온 여사친은, 자기 무릎은 아프지만, 그래도 배구할 때는 모든 스트레스가 사라진다고, 그래서 배구한다고, 인생의 스트레스를 잊기 위해서라도,

엄마의 운동신경을 물려받은 여사친의 큰딸, 어린 나이에 갑자기 양궁 한다고 해서 그냥 시켰다고, 그런데 근성이 있어서 정말 열심히 했고, 그래서 국가대표가 되었다고, 자식 자랑 팔불출에는 남녀 구분이 없나 보다. 그런 소중한 딸이 운동하는데 부모가 이혼한다 어쩐다 해서 집중력 떨어져 앞길 망치면 안 되니까 그래서 자신의 희생은 괜찮다고, 그리고 큰 딸이 잘되는 모습을 보면 그게 삶의 희망이라고, 그리고 아들과 함께 하는 편의점도 큰딸이 통 크게 투자해줘서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래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한다.

딸과 아들, 둘을 위해서 사는 것이 희생이라고 생각 들지 않는다고 하면서, 대견하다 내 여사친 잘 늙었네.

내게도 큰딸, 그리고 아들, 언젠가는 독립해서 자신만의 세계로 날아가겠지.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면서 나도 뿌듯함을 느끼며 같은 마음을 먹지 않을까. 비빌 언덕 없이 살았던 나는 비빌 언덕 없음을 원망하면서 땅바닥을 주먹 치고 일어나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치열하게 살았다. 그래서 내 아이들 만큼은 내가 튼튼한 아이들의 비빌 언덕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래서 앞만 보고 달렸다.

살다 보면 취미나 특기가 뭐냐고 많이들 묻는다. 학교 생활기록부 작성 때도 적어야 하고, 직업세계에서도 인사카드에 기록하기도 하고, 사람들 만날 때도 물어보고, 왜들 그렇게 궁금한 건지, 그런데 나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선뜻 대답을 못한다.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냥 독서나 영화보기라고 말을 한다. 제일 쉬운 핑계니까. 다행인 것은 정말인지 모르지만 독서나 영화감상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의 취미나 특기로 입에 오르내리는 것을 본다. 정말일까. 아님 괜찮은 핑곗거리 중 하나일지도,


이런 퍽퍽한 내 삶 속에서 힘들게, 그리고 거의 완성되어 가던 비빌 언덕이 갑자기 모래성으로 바뀌면서 큰 파도에 쓸려가 버렸다. 내 아이들에게 비빌 언덕을 만들어주는 게 내 삶의 의미였는지도 모르는데, 너무 허망하게,

정말 다행스러운 건 내 아이들은 옆으로 크게 새지도 않고 나이에 맞게 겪을 것 겪으면서 자랐다. 다른 집 아버지들과 같이 캠핑도 함께 자주 가고, 가족여행도 자주 가는 그런 아버지를 해주지 못했지만 잘 자라주었다. 나도 아버지 역할을 하시는 분의 따뜻한 보호를 느껴본 적도 없었으니까. 어린 나이부터 그냥 하루하루 살았으니까, 죽지 못해서,


“아빠, 어디야, 나 족발에 쟁반국수 먹고 싶어, 사주라”

“울산이야, 며칠 있다가 올라갈 거야, 계좌로 돈 보내줄게, 맛있게 먹어라, 누나 것은 미리 반찬 그릇에 덜어놓고”


모처럼 아들과 전화통화다. 아들아 나도 이번 인생에서 아버지는 처음이다, 너무 어렵고 힘들다, 아버지 자격증이 있으면 공부라도 해보겠는데, 아버지라는 존재는 3D 업종 중 하나구나. 이렇게 어려울 줄 알았으면 미리 절이라도 가서 마음 수양을 쌓았을 텐데, 지금 나의 아버지 역할이 맞게 하는 건지 매번 고민하고 고민한단다. 미안하다. 내 애들아.


닷새 (부산에서)


부산 송도 해수욕장과 가까운 곳에 있는 돼지국밥집에서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아들 낳고 살던 친구, 부인과 아들을 먹여 살려야 하기에 어린 나이부터 화물차 탁송 일을 했던 친구다.


조그마한 상하방에서 살림을 시작한 친구, 아들의 돌잔치라고 친구들을 초대해서 집들이 겸 돌잔치도 했던 친구다. 정말 어린 나이지만 책임감을 갖고 성실히 남편과 아버지 역할, 바로 훌륭한 가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던 친구다.

어느 늦은 저녁시간에 병원 응급실이라며 울먹거리는 제수씨의 연락을 받고 친구 몇 명과 급히 병원 응급실로 찾아간 날, 훌륭한 가장 역할을 해왔던 내 친구는 좌측 팔 한쪽이 없는 상태로 의식이 없었다.


“새벽에 1차로를 달리는데, 곡선구간에서 갑자기 서 있는 고장차를 보고 피하려다가, 피한다고 피한 게 중앙성 가드레일로 차가 넘어지면서 좌측 팔이 떨어져 나가 버렸나 봐요”

“야 B야 눈떠봐”

어린 나이에 내 눈에 비친 친구의 처참한 모습. 그때 나도 모르게 친구 껴안으며 눈떠보라고 말하면서 울었던 게 생각난다.

“떨어진 팔은 병원에 가져왔는데, 너무 출혈이 심했고, 봉합수술을 하기에는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어서, 사람 살리는 쪽으로 선택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의사의 설명, 사람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뜯겨 나간 팔의 봉합은 포기했다고 한다. 이제 20대 초반인데, 한쪽 팔 없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렇게 열심히 살려고 발버둥 쳤는데. 너무나도 세상은 그리 공평하지 않는가 보다.

지금 그 친구가 부산에 있는 중소기업에서 회계 업무를 담당한다. 좌측 팔은 여전히 없기에 의수를 하고 다닌다.

“몇 년 만이냐, 이렇게 만난 게”

“야 반갑다, 얼굴 보니까, 참으로 보기 좋다”

“아들 많이 컸겠다야”

“많이 컸지, 그리고 지금은 집사람하고 함께 살고 있어”

“언제부터, 다행이다. 너무 다행이다. 너 같은 남자 없지, 어디서 너 같은 남자를 찾냐”

“집사람이 고생이지, 그래도 착한 사람이야, 그리고 나 둘째도 낳았어”

“정말 잘됐다. 정말 잘됐어”

한쪽 팔과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채로 친구가 좌절할 때, 나이 어린 제수씨는 젖먹이 아들을 두고 집을 나갔다. 나가버린 제수씨를 대신해 친구는 아들을 키우기 위해 한쪽 팔로 버티며 살았다. 원래 성향이 착한 놈이라 술 먹고 깽판 치면서 폐인으로 방황하며 살지 않고 모든 것을 빨리 받아들였다. 자기 옆에 있는 어린 아들만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마음 한편으로 제수씨가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이사 가지 않고 전화번호도 바꾸지 않고 살았단다.

세월이 흘러 아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제수씨로부터 연락이 와서 함께 살기를 원했고, 친구는 자신의 탓이었으니, 누구를 용서할 것도 없다고 그냥 제수씨를 품으로 안았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지금 친구의 현명한 행복한 선택으로 둘째 아들까지 낳아서 잘 살고 있다. 친구는 자기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버텼다. 그리고 그 결과는 행복이었을 것이다.

마치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 <결국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나를 다스려야 뜻을 이룬다. 모든 것은 내 자신에 달려있다>라는 말씀처럼 친구는 스스로를 다스려서 행복을 잡았다. 나는 지금 나를 다스려야 함이 얼마나 힘든 줄 아니까, 그래서 피하기 위해서 도망친 걸까. 정말 도망친 건가.


한쪽 팔이 없어도 열심히 사는 내 친구, 이 시대의 아버지 표상이 아닐까. 한쪽 팔이 없는 내 친구는 정말 훌륭하게 아버지 역할을 해나가는 모습에 내가 부끄러웠다. 친구도 나도, 이번 생은 처음인데, 그리고 나는 양팔 모두 있음에도, 훌륭한 친구 앞에서 너무 부끄러웠다. 친구의 멋진 아버지 역할을 수행하는 모습에 존경심이 절로 생긴다. 마치 나라는 남자가, 나라는 아버지가, 나라는 사람이.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응원처럼 가슴에 스며든다.


엿새(청주에서)


청주에 살고 있는 대학교 동창인 Mr. 벤틀리. 내 연락받고 급히 찾아와 준 친구. 퇴근시간도 아닌데, 자신이 회사 대표이니 괜찮다면서 벤틀리를 멋들어지게 몰고 온 친구. 그 덕에 벤틀리도 타보고, 호강하네.

“사는 것은 어쩌냐”

“그럭저럭, 나는 뭐 공무원이니까 항상 물레 방아지”

“어머니랑, 애들은 잘 있지”

“어머니는 건강하시고, 애들은 잘 크고 있지, 너 어머니는”

“우리 가족은 다들 건강하지, 너도 참 열심히 산다, 지금은 어떠냐, 괜찮아졌냐”

“뭐, 똑같지. 이제는 조금 지친다, 이젠 정말 쉬고 싶다”

“그래도야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어. 힘내, 너 퇴직하고 나서 갈 때 없으면 나랑 같이 일하면 되잖어, 또 너는 토목 기술자인데, 뭐가 걱정이냐”

친구의 아버지는 광주에서 아주 큰 목재소를 하셨다. 대학 다닐 때 친구들하고 친구 아버지 목재소에 가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목재소에 들어오는 나무들을 수직으로 세우는 일을 했다. 태양광에서 건조하기 위해, 또는 크기에 따라서 나무를 옮기는 작업도.

목재소 일이 단순한 것 같지만, 기술이 있어야 한다. 5미터 이상 길이에 두꺼운 나무를 수직으로 들고 이동할 때는 균형 잡는 기술과 양손으로 잡는 기술도 상당하게 필요했었다. 처음 아르바이트하는 우리들은 항상 아버지를 도와서 일을 했던 친구만큼은 하지 못했고, 목재소에서 항상 일을 하던 근로자의 작업 속도에 따라가지 못했다.

그래도 아버지는 아르바이트 일당은 푸짐하게 주셨다. 그리고 고기도 사 먹으라고 친구 주머니에 돈도 찔러주시고, 나름 멋진 아버지로 기억한다. 가끔 부럽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런 멋진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창때의 60이 조금 넘긴 연세였는데 암으로 돌아가셨고, 부천에서 경찰 생활하던 나는 아버지의 장지까지 친구와 함께 했었다. 정말 아버지로서 멋졌던 분인데,

나는 어떻게 해서라도 대학 졸업장은 따겠다는 마음으로 대학을 다녔다, 편의점 알바, 호프집, 나이트클럽, 노가다, 대형마트 매데 전시 상품 영업, 정말 안 해본 것 몇 개 빼고 많은 직종에서 아르바이트하면서 대학을 다녔다. 이때 내 자취방에 쌀이나 김치가 없으면 친구가 한 보따리씩 가지고 왔었다. 그리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내 자취방에서 같이 살기도 했었다. 물론 내 자취방은 여러 친구들의 보금자리였고, 외로운 나에게는 즐거움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자취방에서 만들어진 추억은 아직도 친구들끼리 만나면 서로 이야기를 하는 그런 재미난 추억의 즐거운 정원이기도 했으니까.

친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큰아들로서 홀어머니를 모시고 사업을 멋들어지게 하는 친구다. 물론 목재사업은 아닌, 부동산 사업이지만, 나름 아버지의 사업 DNA를 물려받아서인지 돈의 흐름을 볼 줄 아는 친구다. 그런 친군데 나와 자주 연락도 못하고 만나지도 못했었는데 갑자기 내가 온다고 하니, 바쁘게 사업하는 친구가 일을 미루고 나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헤어지는 순간 뭔가 눈치를 챈 것인가. 내 뒤통수를 향해 친구의 외침이 들린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아야. 힘내”

뭔가 내 머리를 콩하고 때리는 것 같다. 퇴직 후 삶은 걱정하지 말라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라고 위로해주는 친구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래도 나는 나름 친구들이 멋진 것 같다.


이레 (김포에서)


김포에 있는 삼겹살집, 술 마실 때 항상 가던 단골집이다. 단골집이 된 이유는 홍어무침이 반찬으로 나온다는 단순한 이유, 고흥이 고향인 20년 베테랑 수사관 K 형님이 항상 찾는 곳이다. 그런 단골집으로 오래간만에 왔다. 수사부서에서 근무할 때 함께 했던 여러 동료들, 내가 올라간다고 하니, 바로 벙개팅으로 식당까지 예약해서 만나게 되었다.

“언제 김포로 다시 올 거야”

“형님이 와야지, 우리 일단 뜨자 모임이 없어지겠어, 어떻게 한번 떠야지, 이름만 일단뜨자야 한번 뜨지도 못하는데”

“일뜨 회장님이 이번에 지능팀장님이 되셨어, 그렇지 않아도 모임 회장으로서 신경을 전혀 안 쓰는데, 팀장까지 되어서 전혀, 그러니까 형님이 올라와야 돼”


일단 뜨자 모임은, 외국여행을 가고 싶어 하는 경제범죄 전담 수사관들의 마음을 오롯이 담아서 만든 모임이다. 가끔 동남아 쪽으로 여행 스케줄 이야기를 하면, 누가 형사가 아니랄까 봐,

“필리핀으로 가게, 내 사기 사건 피의자가 필리핀으로 도망갔는데, 안 들어오네, 이왕 간거 잡아갔고 오게”

서로 어느 나라에 자기 사건 수배자가 있다고 하면서, 여행 가서 잡아오겠다는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은 하지 말고 일단 뜨자라는 개념으로, 그런데 지금까지 뜨질 못하고 있다. 또 뜨려고 큰 마음먹었더니 코로나 19가 막아버렸다.

“태국이나 베트남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그리고 나중에 스페인도 가고”

“그러니까 형님은 얼른 김포로 올라와요, 충주에 그만 있고”

“내가 올라가면 김포에 자리가 있을까”

“자리 엄청 많아, 형님 온다면 자리가 바로 생기니까 걱정하지 말아, 없으면 내 자리로 와”

“요즘 김포에 사건 많지”

“외부에서 유입되는 인구가 많아가지고, 삐끗하면 사기네 어쩌네 하면서 고소장을 무조건 들고 오니까 힘들어, 인원 보충도 안 해주고”

부천에서 김포로 넘어올 때, 그때만 해도 김포는 도농지역으로 정이라는 게 시골스러웠다. 마을에서 누군가가 새벽에 술 먹고 깽판 친다고 하면 그쪽 마을 이장님에게 전화로 부탁하면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순찰차 한 대로 엄청 넓은 지역을 관할해야 하는 특성으로 동네 이장님들 연락처는 다 가지고 있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도시가 되어서 옛날 같은 사람과 사람의 정은 사라져 버린 것 같아서 마음이 그렇다.

그리고 부천에서 근무할 때는 혈압이 높았다. 의사가 혈압약을 먹어야 한다고 했었으니까, 그런데 김포로 전입 와서 근무하는데 부천과는 확연히 다르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혈압이 낮아졌고, 지금 반백년이 넘은 내가 혈압약이나 당뇨, 고지열증 등 지병으로 인해 의무적으로 매일같이 복용해야 하는 약은 하나도 없다. 매일 챙겨 먹는 약이라고는 비타민 C나 몇 가지 영양제 외에는 없다. 영양제도 먹은 지 최근이다.

그래도 경찰 생활하면서 알게 된 많은 경찰관들, 광주냐 김포냐, 그래도 함께 살자고, 어서 오라고 손짓해준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연락이었는데, 벙개를 해서 찾아와 주는 멋진 동료 수사관들이다. 나름 경찰생활을 잘 못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 보잘것없는 나를 반가워해 주니 말이다. 너무나도 다들 고맙다.

여드레 (서울에서)


서울의 대표적인 건물이 뭐냐고 묻는다면 예전에는 63 빌딩이었지만, 지금은 서울 삼성동에 있는 코엑스와 무역센터 건물도 있고, 송파구에 롯데월드타워 건물도 있다. 63 빌딩을 제외한 서울에서 대표적인 건물들을 관리 기획하는 등 멋진 비즈니스를 하는 인생 후배 K가 있다.

“나 서울인데, 저녁에 볼까”

“이사님(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원우회 활동 시, 흥보 이사를 했는데, 이를 계기로 내 호칭을 이사라고 부른다)은 어딘데요”

“삼성동 쪽으로 가고 있지. 이것저것 볼 것 많네”

“바로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나갈게요”

서울 삼성동 주변, 엄청난 건물이 많다. 수년 전에 무역센터 건물에 있는 전략물자 관리원에서 며칠 교육을 받으면서 코엑스와 무역센터 건물을 구경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바쁘게 왔다 갔다 했으니 삼성동 주변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유롭게 눈으로 보니, 정말 멋들어진 동네다. 그런데 멋지고 웅장한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골목길, 그리고 골목길에 있는 허스름한 주점, 이 주점으로 들어간다.


“근무시간인데, 대낮부터 술 마셔도 되는 거야”

“이사님, 나 나름 직책 높아요, 걱정하지 마요, 이사님이 오셨으니까 내가 나온 거지, 나 만나려면 상당히 어려운 사람이에요”

“고마워, 황송하구만”

대낮부터 삼성동 어스름한 주점 안에 있는 테이블 몇 군데에는 60대 후반에서 70대로 보이는 양복 입은 흰머리의 어르신들이 앉아 담소를 즐기며 술을 마시는 모습이 보인다. 우리도 그 틈에서 술을 마신다.


“저기 보이는 어르신들 보이죠”

“엉”

“나 들어올 때 저분들에게 인사하면서 들어온 것 혹시 보셨어요. 다들 한 자리씩 하는 분들이에요. 삼성동에 있는 건물의 건물주나 회사 회장님들이에요, 지금 시간에 이곳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은 나름 한가닥씩 하시는 분들이죠”

“그럼 우리도, 한가닥 하는 사람인가 보네, 어깨에 힘들어가는데”

그렇게 정오부터 시작한 술자리, 내가 왔다고 아예 퇴근하고 나와버린 K. 을지로에 있는 노가리 골목을 경유해서 몇 차까지 술을 마셨는지 기억할 수 없을 정도다.

“이사님은 잘 되실 겁니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거든요”

“고마워, 항상 잘 봐줘서”

“나중에, 이사님 기술사 따서 사무실 낼 거면 내가 관리하는 건물에 사무실 하나 드릴게, 걱정하지 마요. 다 사는 방법이 있더라니까”

“그러게, 든든하네 자네가 있어서, 기술사 시험이나 합격했으면 좋겠구먼”

“안되면 퇴직하고 나랑 태국 가서 살게요, 나도 조금 더 있다가 회사 그만두려고요, 그리고 태국에 있는 시장인데 철도길 위에 있는 시장이 있어요, 그쪽이 관광지인데 그 부근에서 내가 아는 사람이 골프 유락시설 운영하는데, 나보고 와서 맡아달라고 하거든요, 뭐 정 안되면 그곳에서 일도 하고 골프도 치면서, 멋지게 살면 되죠”

내 멋진 인생까지도 설계해준다. 든든하다. 나름 무역센터와 코엑스에서 한자리하고 있는 K는 항상 당차고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 참으로 보기 좋다.

석사학위를 받던 그날, 축하 꽃다발을 들고 유일하게 내게 찾아와 주었던 K. 학위식 날 처량하게 혼자 있을 것 같아서 갑자기 찾아왔다는 K. 회사 조퇴까지 하고 찾아와서 축하해줬던 인생 후배다. 참으로 멋진 그런 친구다.


“I thought it would be the last trip of my life. but it turns out to be a new beginning”

내 인생 마지막 여행을 위해, 광주, 화순, 울산, 부산, 청주, 김포, 서울을 빙 돌았다. 나는 마지막 여행으로 갔는데, 가서 보니, 죽다 살았다고 하면서 좋아하는 친구,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면서 뭔가를 아는 것처럼 위로해주는 친구, 빨리 오라고 언제든지 오라고 말을 해주는 경찰관들, 한쪽 팔로도 훌륭하게 가정을 지키면서 살고 있는 내 친구, 내 능력을 항상 좋게 봐주던 긍정적인 인생 후배, 딸을 위해 힘들어도 열심히 사는 여사친, 다들 너무 훌륭한 인생 선생님이다.


나는 여행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고 아무 일 없듯 출근했다. 정말 아무 일 없듯. 그리고 아무 일 없듯이 많은 동료들이 반가운 인사를 해준다.


"휴가 잘 갔다 왔어"

"얼굴 좋아졌네요"

"놀지만 말고 일좀 해, 일하는 걸 보지 못했네"


많은 동료들이 내 주변을 지나쳐 가면서 안부 인사를 전한다. 국내 및 국외 사이버 수사관을 대상으로 신종 사이버 범죄 추적 기법을 전수하는 사이버 추적 전문가, 텔레그램 여성 성착취 사건의 주범 갓갓과 박사방 조주빈을 검거하는데 핵심이 되었던 사이버 수사의 전문가, 디지털 증거를 모두 찾아내는 디지털 포렌식 전문가, 디지털 성범죄 예방 전문가, 강력사건 발생장소에서 감식을 담당하는 전문가, 강력형사로서의 추적 전문가 등 많은 전문가들이 내 주위에 포섭되어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들과 함께이며 내 책상과 의자가 그 자리 그대로다. 따뜻함이 전해져 오는 동료 전문가들의 토닥임들과 내 자리가 그대로 있음에 작지만 소소한 안정감이 느껴진다.

처음 출발할 때는 돌아올 생각이 없었는데, 여행하면서 만난 친구들 덕분에 나에게 새로운 삶의 에너지가 보충되었다. 그리고 2020년 8월 행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내가 2019년 삶의 마지막 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면 2020년에 나에게 어떤 변화가 생길지 전혀 몰랐을 거다. 그리고 2021년도의 현재, 나는 이 글을 쓰고 있다. 쓰고 있으면서 가슴이 찌릿찌릿하다. 그때 이랬더라면 어땠을까. 내가 박사학위를 취득할 것도 몰랐을 거 아냐, 와 소름. 아깝다고 하늘에서 구름과자 먹으면서 자책하고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래도 나는 나름, 내가 인생을 살면서 잘살았던 것 같다. 갑작스러운 방문에 스스럼없이 나와주고, 반가워해주는 친구들, 내가 잘못된 삶을 산 것은 아니구나, 정말 선한 영향력을 주기도 했고 받기도 하면서 열심히 살았구나를 느끼게 해 주었던 내 삶의 중요한 터닝 포인트였다.

나의 마지막 인생여행은, 나에게 새로운 인생의 출발점을 알려준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오늘도 열심히 재미나게. 새롭게 시작한다.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 나만을 위한 나만의 인생을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행복해지기만 할 미래를 위해서.




*사진은 인터넷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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