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나무
수십 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수직 세상에 들어섰다. 순간 숨 쉬는 것이 훨씬 수월해졌다. 그때까지 익숙하던 상쾌함과는 다른 기운이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이 서서히 이완되었다.
입안에도 무엇인가 확 달라붙는 자극을 받았다. 긴 호흡과 함께 공기를 씹어보았다. 달착지근한 느낌이 제법 괜찮았다. 더욱 신기한 건 바닥에 다른 식물이 전혀 없어 누군가 빗자루로 쓴 듯 정돈되어 있었다. 신선했던 이 체험은 편백나무 숲에 처음 갔을 때의 기억이다.
21세기가 되면서 사람들은 ‘건강’에 대한 관심이 더 높아졌다. ‘웰빙’이라는 건강 생활양식이 등장했고 숲을 찾는 문화도 그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피톤치드라는 물질과 그것을 발산하는 편백나무가 관심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식물이 내뿜는 향기가 피톤치드다. 특히 편백나무는 피톤치드 분비가 많은 나무로 알려졌다. 현대인의 관심을 받을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췄고 관련 분야가 주목받았다. 그런데 무조건 긍정적일 것 같은 피톤치드와 편백나무도 관점에 따라 또 다른 딜레마가 숨겨져 있다.
첫 번째 딜레마는 피톤치드의 모호함이다. 사람이 풀숲을 거닐면 풀냄새가 진동한다. 이것은 사람의 관점에서는 ‘풀이 향기를 풍겨 나를 반긴다’이다. 그러나 풀의 관점은 다르다. 풀냄새가 곧 피톤치드이고 보호물질이다. ‘자신을 건들지 말라’는 신호를 내보낸 것이다. 같은 상황임에도 사람 생각과 식물의 메시지가 다르다. 인위적인 관리에 대한 경고이다.
두 번째 딜레마는 숲의 효용성이다. 편백나무는 다른 식물의 생장을 억제하는 배타성이 강하다. 그래서 편백숲은 다른 식물이 거의 없다. 숲이 말끔했던 이유가 있었다. 편백숲 피톤치드가 사람에게는 향긋한 내음이나 곤충은 대체로 꺼린다. 더구나 먹이나 쉼터가 되는 다른 식물이 없으니 살 수 없다. 먹이가 되는 곤충이 없어 편백숲은 새집도 없다.
숲은 다양한 생물 종이 공존할 때 안정되고 건강하다. 편백숲처럼 다양성이 상실된 숲은 그렇지 않다. 현대인은 지친 심신 회복을 위하여 숲을 찾는데 특히 편백숲, 소나무숲…. 등 단일 종으로 이루어진 숲을 선호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선호하는 단일 종 숲을 확장하는 것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숲의 안정을 위하여 다양한 종으로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머리가 복잡해지는 딜레마다.
두 개의 딜레마는 ‘만물의 영장’ 인간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전한다. 공존의 경고장과 함께 단일 종으로 구성된 숲은 자연의 섭리에 어긋난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이처럼 숲은 지속 가능성의 실마리를 전한다. 그런 오묘함에 매료되어 숲에 흠뻑 빠진 나의 시간이 있었다. 그 몰입했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편백숲을 찾았다. 이전에 느낀 신선함보다는 익숙함이 있었다.
숲에서 가장 큰 편백나무 앞에 섰다. 두 팔로 다 휘감을 수는 없지만 나무를 꼭 껴안았다. 처음 찾았을 때의 신비스러움과는 다른 애틋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미~용~감~사’라는 숲 활동가들의 주문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미안합니다’ ‘용서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