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퇴근하고 집에 오니 책 한 권이 도착해 있었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 보낸 제주 설화 관련 책이었다. 개인적으로 관심 있는 분야라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몇 페이지를 넘겼다. 그러다 한 문장 앞에서 책장이 멈췄다.
“특히 이 책의 글에는 여러 학자님과 교수님께서 발표했던 자료를 참고로 인용했음을 밝히며, 일일이 허락받지 못했음을 혜량 바랍니다.”
순간 한숨이 나왔다. 그러니까 이 책은 여러 자료를 가져다 썼고, 허락은 받지 못했거나 애초에 받을 생각이 없었거나. 그 모든 과정을 ‘인용’이라는 단어로 고상하게 포장한 셈이다. 그 다음 장을 넘길 자신이 없었다. 저자 개인의 주장도 있겠지만, 책의 핵심을 이루는 내용은 대부분 여러 학자와 연구자의 성과였다. 그것도 허락 없이, 일방적인 혜량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사실 이런 상황이 처음은 아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이라는 이름으로 쉽게 가져다 쓴다.
“어디서 이렇게 나왔대.”
“그러니까 내 말이 맞잖아.”
이런 주장을 하고 싶은 걸 것이다. 일상적인 대화나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는 발표, 숙제라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책 이야기는 다르다. 요즘은 자신의 책에 다른 사람의 글을 인용이란 이름으로 실어놓고도 아무렇지 않게 여기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인용했다고 밝혔으니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비유가 과할지 모르겠지만, 이건 미리 말도 없이 남의 지갑을 가져가 놓고 “급해서 잠깐 썼다”고 통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돌려주겠다고 말한다고 해서 그 지갑이 내 것이 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자신만의 책을 쓰고 싶다’는 분들을 만나면 꼭 한 가지를 물었다.
“관련된 책들을 많이 읽으셨나요? 앞으로도 계속 읽으실 건가요?”
대부분은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이곤 한다. 그리고 그렇게 대답한 열 명 중 여덟, 아홉은 원고를 쓸 때 자신이 읽었던 책의 내용을 아주 자연스럽게 가져온다. 문제는 그 순간, 그것이 ‘내 생각’이라고 착각해버린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인용을 전부 빼고, 본인의 생각과 직접 겪은 사례만으로 다시 써보시겠어요?”
그러면 초고의 절반 이상이 사라지거나, 아예 더는 쓰지 못하겠다고 두 손을 들고 물러선다. 그제야 알게 된다. 그 글의 상당 부분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신이 동경하는 것에 쉽게 동화된다. 영화를 보다 주인공에게 이입되는 것과 비슷하다. 영화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 마련이지만, 글을 쓰다 보면 사정이 조금 다르다. 자신이 동경하는 문장, 구성, 소재를 너무 간절히 원한 나머지 어느 순간 그것을 자신의 것처럼 착각해버린다. 그렇게 둔갑한 생각들은 시간이 지나도 쉽게 분리되지 않는다.
이런 감각이 무뎌지다 보니, 이제는 창작에서 AI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보다 어떻게 하면 더 그럴싸하게 ‘내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인가에 치중하는 현상까지 벌어진다. 고민의 방향이 창작이 아니라 위장으로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비단 글만의 문제는 아니다. 우리는 종종 내 것이 아닌 것을 더 욕망한다. 그 결핍 자체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간절함은 창작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다만 내 간절함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땀과 시간이 켜켜이 쌓인 결과물 역시 존중받아야 한다. 타인의 색을 빌려 나를 포장하기보다, 내가 가진 색이 무엇인지 묻고 드러낼 방법을 고민해야 할 이유다.
한숨을 깊게 빼앗아간 책 한 권과 마주한 덕분에, 나 역시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과연 남의 것을 내 것으로 둔갑시키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기를, 앞으로도 그러지 않기를 조용히 다짐해본다. 타인의 시선을 따라가느라 분주해지기보다, 적어도 내 시선에는 솔직해보기로 한다. 집 안에 들어서 거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