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었지만, 단단해진 시간
1999년 12월, 필자는 상하수과 한강수계팀에 발령받았다. 「한강수계법」이 제정된 이후, 후속 조치를 위해 신설된 부서였다. 공직 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지만, 동시에 한 걸음 더 성장할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었다.
당시는 1999년 2월 법 제정, 8월 시행 이후, 수계기금의 구체적인 운영을 위한 사업별 지침을 마련하던 시기였다. 주민지원 사업, 환경기초시설 설치 및 운영비, 친환경 청정산업 등 다양한 사업을 두고 중앙부처와 5개 시도 간의 치열한 논쟁이 이어졌다.
각 시도는 지역의 특성과 수질개선 필요성에 따라 예산 배분과 사업 우선순위를 주장했고, 중앙부처는 법령의 취지와 형평성을 기준으로 조율하려 했다. 회의는 연일 이어졌고, 합의 도출은 쉽지 않았다. 특히, 상류 지자체 간 함 푼이라도 더 가져가려는 싸움이 치열했다. 회의 도중 강원도 또는 경기도 국장이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간다. 한강유역청장이 뛰어나가 데리고 오기를 몇 번을 했다. 그만큼 국장들의 부담이 큰 협상이었다.
임창렬 경기도지사는 「한강수계법」에 대해 남다른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법은 경기도가 제안해 의원입법으로 제정된 것이었기에, 도지사에게는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경기도의 정책 리더십을 상징하는 성과였다.
그는 사소한 내용까지 직접 보고받았고, 수시로 지시를 내렸다. 전문가, 시민단체와의 토론도 자주 열렸으며, 정책의 방향성과 세부 내용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당시 6급 차석이었던 내가 거의 모든 보고서를 작성했다. 매일 밤을 새워 문서를 만들고, 아침이면 환경국장을 모시고 회의에 참석했다. 휴일 없이 사생활은 완전히 접어 두고, 오직 일에만 몰두했던 시간이었다.
그 시기에는 수많은 정책 이슈가 밀물처럼 쏟아졌다. 물이용부담금 기존의 톤당 80원에서 110원으로의 조정 조정 협상, 「환경정책기본법」에 따른 팔당 지역 환경영향평가 대상 확대, 수도법에 따른 상수원보호구역 농약사용의 제한, 주민지원 사업 기준 설정 등 수계기금 사업 지침 마련, 이 모든 과제를 동시에 다뤄야 했고,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었다. 2년 동안 한해 거의 10일 이상 쉬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은 공직자로서의 한계를 시험받는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정책을 설계하고 제도를 움직이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를 체감한 시기였다. 도지사의 강한 의지, 환경부, 타 시도와의 치열한 협상, 밤샘 보고서 작성, 그 모든 과정은 한강수계법이 단순한 법률이 아니라, 현장과 사람의 땀으로 만들어진 제도임을 보여준다.
2002년 봄, 결국 나는 스트레스와 과로로 쓰러졌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떴는데 몸이 무거웠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집에서 수액을 맞으며 며칠을 쉬었다. 하지만 전화는 끊이지 않았다. 팀장과 과장이 번갈아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 출근하시나?” 당장 급한 일이 많았기에, “더 쉬세요”라는 말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이 부지사에게 보고되자, 행정직 6급 직원이 충원되었다. 그제야 업무 부담이 조금 덜어졌다. 다행히도 주요 현안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때이기도 했다. “고통은 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단단하게 만든 벽돌이었다.”
그 시간은 매일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듯한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지나고 보니, 동시에 업무적으로 한 단계 성장하는 시기였다. 밤샘 보고서, 협상 테이블, 정책 설계… 그 모든 과정은 나를 단련시켰고, 성장의 진통 끝에 얻은 업무 능력은 이후 공직 생활의 큰 자양분이 되었다. 그때의 경험은 단순한 경력의 한 페이지가 아니라, 공직자로서의 정체성과 철학을 형성한 결정적 순간이었다.
2002년 6월부터 7월 초까지, 고생한 시간에 대한 작은 보상처럼, 나는 4주간의 중국교류 연수를 떠났다. 사무실 비우는 것에 대해 우려하는 눈치였지만 워낙 고생한 것을 모두 알기에 위에서 허가가 떨어졌다. 라오닝성 선양(沈阳)에 위치한 정치·경제학원에서의 연수는 중국의 사회와 경제, 그리고 색다른 문화와 풍경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매우 유익한 기회였다. 이미 1995년에 9주 과정의 중국 연수를 이수한 경험이 있었기에, 이번 일정은 더욱 깊이 있고 풍성하게 다가왔다. 낯설지 않은 환경 속에서, 새로운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볼 수 있었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나면 오후에는 주로 선양의 현지 기관과 현장을 방문하고, 저녁 시간과 휴일에는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때마침 한국에서는 2002년 월드컵이 한창이었다. 그 신화적인 4강 진출의 감격과 국민적 열광을 모두 중국에서 경험했다. 선양에는 코리아타운이라 불리는 거리인 시타거리(西塔街)가 있다. 이곳에서 중궁 유학생, 중국동포, 현지인들과 함께한 거리 응원은 아직도 진한 울림으로 남아 있다.
연수 중에는 백두산, 연변, 대련, 단동 등 역사적 의미가 깊은 지역들을 방문하였다. 그곳에서 느낀 민족의 흔적과 문화적 울림은 단순한 관광을 넘어, 공직자로서의 정체성과 사명감을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이 4주간의 시간은 단순한 연수가 아니었다.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새로운 시야를 얻는 재충전의 시간이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다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더 넓은 시야와 깊어진 이해를 바탕으로, 다음 과제를 맞이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