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윤희에게>(2019)
어릴 시절, 윤희와 쥰은 서로 사랑했으나 세상은 그들의 사랑을 부정했다. 둘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을 통해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아갔지만, 그 앎은 낙인찍혔고, 그들에게 수치심을 남겼다. 그렇게 20년이 흘렀다. 윤희의 딸 새봄이 쥰으로부터 온 편지를 본다. 그리고 엄마와 쥰을 재회시키겠다는 비밀 계획을 세운 채 윤희에게 일본 여행을 제안한다. 마치 제 책임도 아닌 모든 것을 감당하고 속죄라도 하려는 듯이….
20년 만에 쥰과 재회한 윤희는 드디어 자신을 위해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오랜 세월 부정당했던 자신의 감정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병이 아니었음을 쥰과의 재회에서 확인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감춰야만 했던, 꺼낼 수 없었던 빛나는 삶의 순간들…. '우리(퀴어)'에게도 아름다운 순간이 있다면, 비록 상처로 물들었을지라도, 그 모습은 아마 윤희와 쥰의 뒷모습을 닮았을 것이다.
요 몇 년 사이, 퀴어 서사(그중에서도 레즈비언 서사)가 쏟아져 나왔다. 특히 문학이 그랬다. 여성 작가의 단편집에는 레즈비어니즘으로 독해할 수 있는 작품이 최소 한 두 편은 실려 있었다. 그들을 읽는 동안 따뜻했고, 종종 아릿했다. 그리고 궁금했다. 왜 레즈비언 서사는 여성 서사의 연장에서'만' 나타나는 걸까?
〈윤희에게〉는 분명 수작이다. 하지만 〈윤희에게〉를 비롯해 최근에 쏟아지는 레즈비언 서사는 새롭지 '않다'. 우정, 사랑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여성 친밀성 서사는 옛날부터 있었다(다만 최근에 그 양이 많아졌을 뿐이다). 문제는 이 모호한 경계에 있다. 레즈비언만의 특이성이 도드라지지 않는 느낌이랄까.
이는 게이 서사의 부각과 비교했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게이'라는 키워드를 빼고 박상영의 소설을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는 이것이 박상영 소설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창작 윤리가 문제 되기 전, 김봉곤의 작품을 읽었을 때는 받지 못한 느낌이었다. 김봉곤의 소설은 '게이'를 빼고 읽어도 무방하다. 그만의 감성으로 그려낸 삶의 풍경이 있지만, 그것을 꼭 게이의 삶으로만 읽을 필요는 없다. 소설의 주인공을 이성애자로 바꾸어 놓고 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소리다. 하지만 박상영의 소설에는 게이여야만 가능한 캐릭터와 서사가 있다. 그것이 그의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다시 레즈비언 서사로 돌아와 보자. 앞서 나는 레즈비언 서사가 기존에 존재하는 여성 친밀성 서사와 특별히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 애초에 여성 서사와 구분되는 레즈비언 서사는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레즈비언은 여성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여성 정체성과 레즈비언 정체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 둘 다 소수자 정체성이다. 그래서일까? 레즈비언 서사가 기존 여성 서사와 어느 정도는 단절한 채 오롯이 거듭날 수 '없는' 것은.
반면 게이들은 정체화할 정체성이 분명하다. 게이들은 여성이자 레즈비언인 그녀들이 겪는 분열을 경험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들이 딛고 있는 정체성 토대는 (상대적으로) 단단하다. 그래서 분열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정서를 풀어낼 수 있고, 그 지점에서 강렬함을 생성해낸다.
〈윤희에게〉에서 윤희를 연기한 김희애 배우가 한 예능 프로에 나와 이야기한 내용이 흥미로웠다. 그는 영화 촬영 시 소재(동성애)에 대한 부담이 없었느냐는 질문에 '특별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여성 서사라 느껴져 부담이 느껴지지 않았다', '소재보다 멜로의 완성도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윤희의 사랑을 찾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이라 여겼다'고 답했다.
물론 톱 배우의 자리에 있는 그가 조심스레 선택한 말들일 가능성도 있지만, 나는 김희애 배우의 말이 독자적인 레즈비언 서사의 '부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기존 여성 서사의 연장에 있으되, 그것과는 또 다른 자기만의 독립성을 지닌 서사의 '불'가능성. 하지만 여성 서사와 레즈비언 서사 사이의 긴장이 반드시 제약의 형태로만 발현될 필요는 없다. 단단한 세상에 균열을 내온 것은 언제나 분열하는 자의 외침이었기 때문이다. 레즈비언 서사에도 그러한 순간이 도래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