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불행은 이성애자들의 것

리타 메이 브라운,《루비프루트정글》

by rewr

나는 레즈비언 소녀의 성장기를 담은 《루비프루트 정글》을 판타지 소설로 읽었다. 《루비프루트 정글》이 그리는 몰리 볼트의 삶은 현실적이지 ‘않다’. 몰리가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쾌감을 느꼈다. 하지만 몰리가 선사하는 쾌감은 《루비프루트 정글》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이기도 했다. 불행을 모르는 퀴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몰리 볼트는 좌절이라고는 모르는 무데뽀 레즈비언 소녀다. 누가 뭐래도 자신을 굽히지 않고 당당하고 솔직하게 대처한다. 친구의 고추를 다른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돈을 받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루비프루트 정글》은 처음부터 소설의 주인공이 내면의 고뇌로 끙끙거리는 퀴어가 아님을 선포한다. 그 무엇도 자신감 넘치며 자기 행복이 제일 중요한 몰리를 우울하게 할 수 없다. 몰리는 매번 상상을 뛰어넘는 ‘되바라짐’으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시도를 조롱하고 박살 낸다.


6.png 《루비프루트 정글》 초판본.


몰리는 불행이 오히려 이성애자의 전유물인 양 군다. 몰리의 친구들은 세월이 흐르자 모두 몰리와 함께한 시간을 부정했다. 그들은 한때 자신이 품었던 퀴어다움을 거부했다. 그 대가는 가혹했다. 이성애자가 되기로 ‘선택’한 그들은 한때 지녔던 삶의 생기를 모두 상실한 채 칙칙한 현실을 근근이 살아간다. 그들은 불행하다. 이성애 결혼은 규범적 친밀성에 진입했다는 위안을 주고 다른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몰리 볼트는 그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긴다. 이 소설에서 동정과 연민의 대상은 퀴어가 아니라 이성애자다.


소설에서 몰리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는 경우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자긍심 넘치는 몰리의 세계에도 우울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성애 권력의 강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행복하기만 한 사람은 《루비프루트 정글》뿐 아니라 그 어떤 소설에도 없다. 우리 세계를 지배하는 이성애규범적 권력관계를 거스르는 몰리에게 우울한 순간이 이토록 적다는 건, 그녀가 남다른 사람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몰리의 퀴어 친구들은 그녀처럼 당당하지 못하다. 《루비프루트 정글》에서 몰리를 제외한 퀴어들은 모두 개별적이고도 집단적인 퀴어 슬픔을 지니고 있다.


즉, 《루비프루트 정글》에서는 몰리 말고 모두가 불행하다. 몰리만이 행복하다. 몰리는 말한다. “여자에게 키스하는 여자는 아름다워요. 여자와 섹스하는 여자는 다이너마이트예요.” 자신의 행복을 훼방 놓는 자들에게도 말한다. “내가 갖고 싶으면 탱크라도 사서 안 된다고 말하는 인간들 밀어버릴 거야.” 퀴어는 불행할 수밖에 없다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행복한 게 정상이 아니겠죠. 저는 행복합니다.”


퀴어를 결핍의 기호로, 불행의 동의어로 여기는 사회에서 몰리 볼트의 삶은 ‘비현실적’이다. 아마 대부분의 퀴어들이 몰리 볼트보다 작은 자부심, 큰 수치심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내가 《루비프루트 정글》을 판타지 소설로 읽은 이유다.


7.png 《루비프루트 정글》 한국어 번역본.


하지만 몰리 볼트는 퀴어 자긍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기도 한다. 사라 아메드가 《행복의 약속》에서 지적했듯, 몰리 볼트는 퀴어가 마땅히 수치심을 느껴야 할 순간에 수치심을 느끼길 거부함으로써 퀴어 자긍심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몰리 볼트는 ‘우리(퀴어)도 당신(이성애자)과 똑같다’라고 말하며 이성애의 권위를 재확립해주지 않는다. 대신 ‘우리의 행복은 당신들이 불행할 거라 여기는 지점에서 시작된다’라고 말함으로써 퀴어다움을 부정하지 않는 퀴어 자긍심을 선포한다.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은 실재하지 않는 세계를 모험함으로써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몰리 볼트는 실재하는 세계를 판타지 소설에나 나올 당당함으로 살아감으로써 우리에게 영감을 준다. 《루비프루트 정글》은 1974년에 나왔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몰리가 상상한 세계와 얼마나 다르고 같을까? 몰리의 바람대로, 그녀는 “미시시피 강 이편에서 제일 잘 나가는 오십 살”이 되었을까? 《루비프루트 정글》이 판타지 소설처럼 느껴지지 않는 순간은 올까? 《루비프루트 정글》이 품은 수많은 메시지와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고민했으면 좋겠다. 그럴 가치와 재미가 넘쳐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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