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우리 한의원으로 전화가 왔다.
"OO경찰서입니다. 김미숙(가명)씨 근무하는 호이재한의원 맞죠?"
통화 내용을 자세히 밝힐 수는 없지만, 이틀째 무단결근 중인 우리 직원에 관한 전화였다.
내가 형사님께 큰 도움을 드리지 못한 채 통화를 끊었을 때 불현듯 떠오른 드라마가 있었다.
고이선균 배우와 이지은 배우가 출연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년 방영)였다.
내용이 너무 좋아서 3번은 봤던 드라마.
생각해보니 내가 그 드라마의 현실판 주인공이 돼버린 것 같았다.
드라마의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면
평범하고 성실한 이선균과, 차가운 현실 속에서 사람을 믿지 못하게 된 사회 초년생 이지은이 만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처음엔 각자의 목적과 오해로 얽히지만, 도청과 관찰을 통해 서로의 깊은 고독과 상처를 보게 된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에게 '나를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이 되어주며, 각자의 행복을 찾아 나아간다.
나와 그 직원의 첫 만남은 작년 여름이었다.
한의원 면접장에서 만난 김미숙(가명)씨는 잔뜩 경직된 모습이었다.
이전 직장에서 집단 따돌림으로 퇴사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20대 초반에 사회에서 상처를 받은 그녀가 우리 한의원에서 치유를 받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채용을 결정했다.
내 마음을 알아주었는지 그 직원은 출근 첫날부터 정말 열심히 일해주었다.
'나도 왕년엔 저렇게 열정 넘치던 때가 있었지.'라는 생각으로 흐뭇하게 그녀가 일하는 것을 지켜봤다.
하지만 드라마와 현실의 결정적 차이는 거기서부터였다. 드라마 속 이지은은 영특한 '일잘러'였지만, 나의 미숙 씨는... 솔직히 말해 일을 못 했다.
그래도 나는 그녀가 우리 한의원에서 우당탕탕 일 하면서 성장하기를 바랐다.
20대 초반 사회 초년생을 내가 안 품으면 누가 품나 하면서 기다려줬다.
그녀가 실수하면 나와 다른 직원들이 수습을 하며 아슬아슬 한의원을 운영해갔다.
보름에 한 번씩 그녀가 다른 직원 흉보러 내 방에 들어와도(그녀는 우리 한의원 직원 모두를 흉봤다.)
우리 한의원에 대한 불만과 요구사항을 A4용지 5장에 걸쳐서 적어와도
정기적으로 지각을 해도
한의원 물품을 훔쳐도
내 방에 있는 서류를 몰래 훔쳐보다 걸려도
이해해줬다. 20대 초반엔 그럴 수 있지...
지난달에는 그녀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당연히 한의원에는 결근.
나는 진료를 마치고 빈소를 찾았다. 그녀의 가족들에게 드릴 공진단도 함께 들고서.
그곳에서 조문을 하며 그녀의 부모님을 뵈었다.
좋으신 분들이었다. 그녀가 좋은 심성을 물려받았으니 앞으로 성숙하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사실 겨울서부터 그녀의 근무 태도가 좋지 않았다.
환자분에게 실수를 많이 하고
지각도 더 잦아졌고
차마 밝힐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다가 들키고
근무 시간 중에도 계속 자기 아프다고 침을 놔달라고 했다.
그러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틀 전부터는 무단결근 중이다.
권고사직처리를 해달라는 카톡 하나 날리고선 전화도 차단, 카톡도 차단을 하셨다.
화가 났다. 배신감에 몸이 떨렸다.
하지만 마음이 가라앉은 뒤 깨달았다. 그녀는 그저 이름처럼 아직 삶이 '미숙'했을 뿐이라는 것을.
드라마처럼 아름다운 구원 서사는 없었지만, 나는 나대로 '어른의 비용'을 치른 셈이다.
다시 그녀가 한의원으로 찾아온다면
관계를 회복하고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그건 모르겠고,
나는 이제 현실판 '나의 아저씨'를 여기서 조용히 종방하려 한다.
그녀를 미워하지 않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어른의 역할이다.
"미숙 씨, 이제는 이름 그대로가 아닌 성숙(成熟)에 이르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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