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과 그 이후의 모습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1편 Paris-11)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Paris



11. 마지막 수업과 그 이후의 모습


1931년에 서울에서 태어나신 어머님은 단 한 번도 일본에 가 보신 적이 없지만 일본인과 구분이 안될 만큼 일본어를 잘하신다. 한때 서울의 모 대형교회에서 설교를 일본어로 동시통역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또 내가 어릴 때 어머님께서 친구분들과 대화하시면서 내가 듣기 원치 않는 말씀을 하실 때는 나를 힐끗 바라보시고는 바로 일본어로 바꾸어 대화를 하시곤 하셨는데, 그럴 때면 갑자기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잘 구사하시는 어머님이 매우 신기하고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어머님께서 일본어를 모국어처럼 그렇게 편하게 잘하시는 이유는 간단하다, 일제 강점기였던 어린 시절,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학교에서 배운 언어가 한글이 아니고 일본어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해방 이후에는 한국어가 다시 공용어가 되었고 따라서 학교에서도 이제 다시 한국어를 모국어로 배우게 되었다. 그 결과 어머님처럼 꽤 능숙하게 일본어를 구사하시던 분들은 그 세대를 끝으로 더 이상 많지 않다.




반면 50여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한 국가의 언어가 다른 언어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경우도 있다. 바로 대만 경우다.


물론 수많은 중남미 원주민들도 과거 그들의 고유한 언어는 완전히 잊고 이제는 모두가 스페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고 있으니, 이 경우도 역시 언어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또 다른 사례가 될 수도 있다. 다만, 중남미 경우 그렇게 바뀌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걸렸던 것을 보면 대만의 경우처럼 매우 짧은 기간에 언어가 바뀐 것과는 좀 다른 경우인 것 같다.


대만인 대다수는 원래 중국 남동부 푸젠(福建) 지방 언어인 민난어(閩南語)를 사용했었다. 대만 총인구의 5% 미만인 원주민을 제외하면 그들의 조상 대부분이 푸젠성 지방에서 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후 대만도 우리처럼 일본 식민 지배를 받았고, 식민지배 시절에는 역시 대만의 학교에서도 일본어가 강제로 교육되어 당시 일본어부터 배운 대만인은 우리 어머님처럼 지금도 일본어를 잘 구사한다. 여기까지는 비슷한 시기 같이 일본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의 경우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이후 대만에서의 상황은 한국에서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길로 진행되었다. 2차 대전 패전 후 일본이 대만에서 철수한 이후에는 중국 본토에서 모택동에 패배한 장개석의 국민당이 대만으로 대신 들어와 집권하게 되었는데, 당시 대만에서 널리 사용되던 민난어를 구사하지 못했던 그들은 민난어 대신 그들이 사용하고 있던 보통화를 대만의 유일한 공용어로 채택해 학교에서 강제로 교육시키기 시작했다.


이후 오랜 기간 보통화만을 강제로 교육시키다 보니, 이제 젊은 대만인들은 원래 그들의 언어인 민난어를 잊어버리고, 보통화를 모국어처럼 훨씬 더 편하게 구사하게 되어버렸다.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에 미국으로 이민 갔던 교민 2세들이 주변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영어를 한국어보다 더 편하게 사용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인 셈이다.


결국 과거 대만의 공용어였던 민난어는 이제 대만 남부지방 일부나 노년층 등 소수만이 예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가 되어 버렸고, 인구 2천만이 넘는 한 국가의 언어는 그렇게 반세기 만에 보통화라는 전혀 다른 언어로 바뀌는 결과가 만들어졌다.


참고로 같은 중국의 언어이니 중국 표준어인 보통화와 중국 남부 지역 언어인 민난어가 상당 부분 서로 유사할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오산이다. 실제로는 두 언어 간 너무도 큰 차이가 있어서 외국어 배우듯이 별도로 배우지 않으면 전혀 알아들을 수 없을 만큼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가 당신에게 말한다"라는 말을 보통화로 하면 "워껀니짱"이지만, 민난어로는 "와까리꽁"이다. 또 식사를 했다는 말은 표준어로는 "워츠러판"이지만 민난어로는 꽤 다른 "짜뻥"이다. 표준어만 구사할 수 있는 중국인은 결코 알아들을 수 없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럽의 프랑스에도 유사한 언어 강제 교육 사례가 있었다. 현재는 최종적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지만, 과거 여러 차례 주인이 뒤바뀌었던 독일과 프랑스 간 대표적인 분쟁 지역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 지방 경우다.


이 지역의 언어 강제 교육 역사를 배경으로 쓴 문학 작품도 있는데,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에는 중학교 교과서에도 포함되어 있던 작품으로 프랑스의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라는 작가가 쓴 단편 "마지막 수업(La Dernière Classe)"이라는 작품이다.


단편의 내용은, 1871년 프랑스가 독일과의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지역이 독일령으로 넘어가게 되면서 이제는 더 이상 학교에서 불어를 사용하지 못하고 오직 독일어로만 수업을 받아야 하는 현실에 대한 아쉬움을 기록한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이 우리 부모 세대가 일제 강점기 시절 학교에서 일본어를 모국어로 배워야만 했던 한국의 아픈 역사와 너무 유사해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으로 매우 감동적으로 읽었던 기억이 있다.


지금까지도 당시 교과서에 실려 있던 프랑스 동부 아름다운 학교 건물과 주인공 소년의 모습이 그려진 교과서의 삽화가 기억날 정도다....


물론 단편의 배경이 되는 알자스-로렌 지역이 실제 누구의 영토인지 불분명할 수도 있고, 또 프랑스인 알퐁스 도데가 프랑스 관점에서만 그 단편을 저술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을 떠나, 단지 허구상의 소설로서라도 강제로 특정 언어를 배워야만 했다는 내용은 같은 경험을 해야만 했던 일제강점기 한국의 아픈 역사를 연상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 단편을 감동적으로 읽었던 중학생 시절에는 비록 슬픈 역사가 있지만 교과서에 실린 단편 삽화에 그려진 것처럼 너무도 아름다운 알자스-로렌 지방에 언젠가 한 번쯤은 꼭 가보고 싶다는 꿈을 가져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단편을 접했던 1970년대 중반은 아직은 한국이 본격적으로 경제가 성장하기 이전으로 대다수가 가난하던 시절이었고 나의 그런 꿈은 문자 그대로 꿈같은 얘기였을 뿐이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전 세계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다니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했고, 여권을 갖고 있는 사람 자체부터 매우 드물던 시절이었다. 한국인들의 해외여행이 어느 정도나마 본격화된 시기는 그로부터 한참 뒤 한국이 올림픽을 유치할 만큼 경제가 성장했던 1989년 1월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 단행 이후였다.




그런데 유년시절 동화 속의 꿈처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던 알자스-로렌 땅을 나도 마침내 직접 방문하게 되는 기회가 생겼다. Paris에서 연수하던 기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실시되는 회사의 집합 교육을 받기 위해 독일을 방문해야만 했는데, 이때 Paris로 돌아오는 길에 연수생 동료들과 함께 바로 이 알자스-로렌(Alsace-Lorraine)을 거쳐 오기로 했던 것이다.


알자스-로렌 지역의 최대 도시 중 하나이며 또 단편 마지막 수업의 배경이기도 했던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를 방문하기로 했고, 우리는 그 도시를 향해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나는 스트라스부르를 향해 가면서 어린 시절 교과서의 삽화에서나 경험할 수 있었던 꿈에 그리던 그 지역의 아름다운 풍광을 맘껏 감상할 것을 기대했다.


(마지막 수업의 배경인 스트라스부르 소개 자료)

http://www.jaturi.kr/news/articleView.html?idxno=4722


그런데 안타깝지만 공교롭게도 우리가 그 도시를 방문하러 가던 날은 마침 그 지역에 안개가 너무도 심해서 차창 밖의 경치를 감상하는 것은 꿈도 못 꾸고 앞차 미등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실정이었다. 결국 차 안에 있던 3명 우리 모두 주변 경치 등 다른 것에는 전혀 신경 쓰지 못하고, 하나 같이 목을 빼고 초긴장 상태로 오로지 정면을 응시하며 운전에만 집중해야 했었다.


주변이 모두 산악지대라서 그런지 정말 처음 경험해 보는 한 치 앞이 안 보인다는 말이 문자 그대로 적용될 만큼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는데, 안개는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더 심해져서 이제는 상향등을 켜도 하얀 백지 같은 뿌연 안개 외에는 눈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상황에까지 이르렀고, 결국 겁이 나서 고속도로 중간에 차를 세운 후 안개가 걷힐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차를 정차하고 차 밖으로 나와 보니, 우리뿐 아니라 다른 차량 운전자들 대다수도 이미 고속도로 위 여기저기에 우리처럼 차를 정차시키고, 안갯속의 좀비들처럼 이리저리 배회하며 안개 걷히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일에 우리들이 정차하지 않고 무모하게 계속 운전했더라면 어쩌면 그렇게 정차된 차들이나 혹은 그 차들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었사람과 충돌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안개를 뚫고 마침내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해 보니, 도시의 분위기는 역시 프랑스의 다른 도시들과는 꽤 달랐다. 물론 현재는 엄연히 프랑스 영토이지만, 독일 국경에 접해 있고 또 역사적으로 독일 영토에 속해 있었던 기간도 결코 짧지 않아서인지 도시의 건물들은 Paris나 프랑스 타 도시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매우 달라서 차라리 독일풍 분위기가 좀 더 많이 느껴지는 그런 건물들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외모도 역시 달랐는데, 전형적인 프랑스인들과는 달리 대체로 체격이 좀 더 크고 금발도 상대적으로 많아서 독일인 같은 느낌이 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히틀러도 알자스-로렌 주민들이 실제로는 우수한 독일의 아리안족임에도 스스로를 열등한 프랑스인으로 인식하고 있으니 참 답답하다고 언급했던 적도 있다 한다.


또 역시 접경지역이라 그런지 주민들 대다수는 불어, 독어 모두 자연스럽게 구사했으며 독어와 같은 게르만어계 언어 영어도 비교적 편하게 구사하는 것 같았다. 또 알아들을 수 없는 알자스어도 구사하고 있었는데, 알자스어는 독일어의 방언 중 하나로 인식된다

한다.


식사를 하기 위해 방문한 평범한 식당의 종업원들 조차도 3~4개 국어 정도는 편하게 구사하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돌아다니며 음식 주문을 받으면서 각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듣고 바로 그 자리에서 주문을 받는 언어를 자연스럽게 바꿀 정도였다.


즉, 손님들이 서로 독어를 사용하는 테이블에 와서는 독어, 불어를 사용하는 테이블에서는 불어, 또 그 지역 방언이나 영어로까지 수시로 언어를 바꾸어 가면서 주문을 받았던 것이었다. 너무나 많은 외국인이 드나드는 도시임에도 유명 관광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불어 외에 영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는 거의 구사하지 못했던 Paris 같은 도시의 모습과는 꽤 다른 상황이었다.


그런데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유럽인들이 3~4개 국어를 구사한다는 것은 우리가 3~4개 국어를 구사하는 것과는 좀 다르다. 라틴어계, 게르만어계, 슬라브어계 등 세 그룹으로 분류되는 유럽의 언어는 비록 국가별로 그 언어가 다르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동일하거나 유사한 알파벳을 사용하며 문법도 같은 어계안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어쨌든 프랑스와 독일 중간에 위치하고 있고 또 역사적으로 그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던 스트라스부르에서는 유럽의 다양한 언어가 혼재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었는데 그런 상징성과 현실이 있어서인지 유럽의 국가 27개국으로 구성된 유럽연합(EU) 의회 역시 바로 이 스트라스부르라는 도시에 위치하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 표결 장면 모습)

https://n.news.naver.com/mnews/article/001/0009078307


그런 면에서 알퐁스 도데가 갈등과 분쟁의 땅으로 묘사했던 알자스-로렌 지방은 과거에는 그의 묘사 그대로 매우 오랜 기간 유럽의 대표적인 분쟁과 전쟁의 땅이었다면, 이제는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하는 그런 땅으로 변한 것 같고, 유럽연합 의회가 소재하고 있는 것처럼 독일-프랑스 간의 통합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전 유럽의 통합을 상징하는 도시로 완전히 변모하게 된 것 같다.


때로는 프랑스 민족주의자로 비난을 받기도 했던 알퐁스 도데가 알자스-로렌의 현재 이런 모습을 보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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