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 부임한 후에 차를 구매할 때, 먼저 차를 구매했던 동료 주재원이 자신이 거래했던 한국인 영업인력을 소개해 줘서 그를 통해서 차를 구매했다.
한편 그영업인력과 만나서 얘기를 나누다 보니 그도 역시 베이징에서는혼자 살고 있다고 해서 주말에 심심하면 부담 없이 연락해 코리아타운 왕징(望京)에서 만나 같이 한국식 당구도 치고 저녁에는 술 한잔 곁들인 식사도 하곤 했었다. 가족이 있는 주재원들은 주중에는 야근 등으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거의 없다 보니, 주말만이라도 반드시 가족과 함께 지내려고 해서 통 만날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회사에 출근해서 회람되는 공문을 보니 그 영업인력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공문에 의하면 그는 한국 폭력조직 출신인데 중국으로 도주한 사람이라는것이었다. 아울러 도주해온 베이징에서도 차 판매 영업을 하면서 역시 몇 차례 사기를 친 전력이 있으니 그를 통해 차를 구매하면 위험하다는 내용이었다.
그 공문을 보고서 되돌아 생각해보니 사실 그와 만날때 좀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경우가 적지 않게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왕징에서 당구를 치다 우연히 마주친 그의 친구라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좀 일반인과 달랐던것 같고, 아울러 그 영업인력 본인도 외모는 너무도 깔끔했고 말투 역시도매우 공손했지만분명히 뭔가 좀자연스럽지 않았던점이 있었던 것 같았다.
객지에서 주말에 적적하기도 해서, 한동안 그와 꽤 가깝게 지냈던 처지에서 이러한 공문을 보고 나니 다소 섬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내 경우는 그로 인해 어떤 피해도 입은 것이 없었고, 차도 정상 가격에 제대로 구매를 완료했으니 별 문제는 없었다.
이런 말하기가좀 고역이지만, 사실 해외 이 나라 저 나라에살면서 현지의 한국인들로부터 자주 듣는 얘기 중 하나가 해외에서는 현지인보다 오히려 한국인을 더욱 조심해야만 한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안타깝지만 실제로 나 역시 직접 그러한 경우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분명히 그건 그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그 개인이 그러한 성향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판단일 것 같다. 미국인이 모두 다 똑같지 않고, 일본인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한국의 인구 5천만이 결코 모두 다 동일한 성향을 갖고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5천만의 한국인이 모두 다 비슷할수 있겠는가?
새로 생긴 우리 부서의 업무도 서서히 시작되어 갔다. 현지 인력들도 하나 둘 충원되어 주재원뿐 아니라 이제는현지인 직원들도 부서에 배치되기 시작했는데, 다소 황당하기도 한 사실이지만 당시 내가 근무했던 중국 베이징 사무실에서는 하루 종일 단 한 마디도 중국어를 사용할 기회가 없는 날이 비일비재했다. 중국에서 주재 근무를 하면서도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한국어로만 직장 생활을 했던 것이다.
영업조직이 아니고 지역본부의 스텝부서라서기본적으로 한국인 주재원이 타 조직 대비 압도적으로 많았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아울러 주재원 중에는 나처럼 중국어를 아직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막 부임한 인력이 많았는데, 공교롭게도 현지인 대부분이 한국어가 가능한 우리의 동포 조선족들이다 보니, 중국어를 사용할 이유나 계기가 좀처럼 없었다.
부서 인력이 모두 충원되었을 때 총원이 약 20여 명 정도로 기억하는데, 그중 한국인 주재원이 10명, 현지인 10명 중 조선족 직원이 9명이었고, 한국어를 전혀 구사할 수 없었던 한족 직원은 단 1명뿐이었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중국어는 단순히 점심이나 또는 저녁에 외부에서 식사하면서 음식 주문할 때나 아니면 근처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살 때 잠시 사용했던 것이 거의 전부였다. 20명 중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한국어를 구사하는데 중국어로는 제대로 의사소통도 되지 않았던 실정에서 왜 한국인들끼리 더듬더듬 중국어로 대화를 하겠는가....
이전에 체류했던 Paris나 Toronto에서는 하루 종일 현지 언어인 불어나 영어로 대화할 수밖에 없어, 때로는 오히려 한국어 단어가 깜빡깜빡할 정도였던 상황과 비교하면 너무큰 차이였다.
하지만 사실 Paris 체류는 해외 연수로 아예 회사 사무실에 출근을 안 하는 상태로 법인의 지원 없이 모든 것을 나 혼자 해결해야 했으니 당연히 주변 프랑스인들과 불어로 대화를 하며 살지 않을 수 없었고, Toronto 판매법인에서는 영업 활동과 직결되는 마케팅 업무를 담당해서 상대하는 주변의 사람들이거의 대부분 캐나다인이라 영어로 대화할 수밖에 없었던 반면, 베이징에서는 스텝부서에서 근무하게 되면서 직접적인 현지의 판매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회사 내부용 보고서를 작성하는 업무를 주로 수행했었기 때문에 이러한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울러 우리 부서가 중국의 전체 사업을 총괄하는 사장님을 보좌하는 스텝부서 조직이다 보니, 우리가 생산하는 보고서 또한 사장님이나, 한국 본사 인력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고 따라서 당연히 한글로 작성되어야만 했었다. 결과적으로 사무실내에서 사용하는 언어뿐 아니라 우리가 매일 작성하고 보고서까지도 모두 한글로 적혀있었고 결국 그만큼 중국어를 접할 기회는 없었던 셈이었다.
중국 땅 베이징에서 근무함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거의 하루 종일 한국어 홍수 속에서만 살다 보니 결과적으로 중국어가 향상될 수 있는 기회는 별로 없었다. 베이징 생활 1년이 다 돼도 중국어 실력은 거의 그대로였던 셈인데, 미흡하지만 그나마 중국어 실력이 조금이나마 향상된 시기는 오히려 약 2년여 뒤에 베이징을 떠나서 대만법인에 부임한 이후였다.
대만에는 우선 조선족 자체가 없으니 조선족 직원은 애당초 없었다. 그리고 약 200여 명 되는 법인 직원 중 주재원은 4 명밖에 안 됐고 한국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던화교가 있기는 했지만 그 수가 불과 3~4명으로 많지 않아서 이 7~8 명을 제외하면 법인에는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직원이 아예 전혀 없었던 것이다.
결국 대만법인 경우 이처럼 한국어가 통하지 않는 조직이다 보니, 의사소통을 위해서는 더듬거리더라도 중국어로 말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중국어 회화실력이 그나마 조금씩은향상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로 조선족은 우리 동포지만 국적으로는 엄연히 중국의 국민이라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는 대만으로 와서 거주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북한인이 한국으로 와서 거주하게 된 경우가 탈북하는 경우가 아니면전혀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요즘은 좀 상황이변했는지 모르겠지만2005~6년 당시는 베이징에 좀도둑이 많아서 우리 회사 몇몇 사무실에서는도난사고를 직접 겪기도 했었다.
그런데 남의 일로만 여겼던 그런 도난 사건이 마침내 우리 사무실에서도 실제 발생했다. 월요일 아침 출근해 보니 내 노트 PC 포함 사무실의 노트 PC 여러 대가 없어진 사건이 발생한 것이었다. 바로 신고해서 경찰들까지 와서 조사하고 갔지만 도둑은 끝내 잡지 못했고 분실한 PC 역시 회수하지 못했다. 경찰에 의하면 주말에 비상계단을 통해서 사무실로 들어와 훔쳐간 것으로 파악된다는데, 변두리나 우범지대도 아닌 베이징 시내 한복판 고층빌딩에서 이러한 도난 사고가 발생했으니 당시는 그만큼 도둑이 많았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 도난 사건을 계기로 1층 비상구나 엘리베이터 진입구에 한국에서처럼 사원증을 접촉해야 문이 열리는 그런 장비가 새로 설치되었고 이후에는 도난사고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혼자 살다 보니 결혼한 사람들과 달리 주말에 꼭 가족들과함께 시간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서 휴일에는 가끔텅 빈 사무실로 출근해 주중에 못 마친 일들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있었다. 경험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주말이나 휴일 아무도 없는 회사 사무실은 너무나 조용해서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서 작성해야하는 보고서를 마무리 하기에는 정말로 최적의 환경이었다.
그런데 평범한 주재원이었던 베이징에서의이 '가끔'이었던 휴일 출근 습관은, 이후 법인장으로 주재 근무를 했던 대만, 홍콩에서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모든 휴일'에 출근을 하는 것으로 변해 버렸다. 비록 단 1~2시간이 되더라도 일단은 사무실로 출근을 해야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아마 직급이 법인장으로 올라가면서 그만큼 책임도 커졌고 부담도 역시 늘어나다 보니, 회사 사무실에 잠시라도 꼭 나와보는 것에 집착하게 되는 다소 병적인 그런 이상한 습관이 생겨버린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게 내가 출근한다고 직원들도 동반 출근하라고 강요하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 정도의 양식은 있었다. 물론 휴일에 출근하는 직원들도 간혹 있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필요와 판단에 의한 것이지 결코 나의 노골적이거나 묵시적 강요는 아니었다.
아무도 없어 적막이 흐르는 휴일의 17층, 그리고 이후 이사 간 24층 텅 빈 사무실에서 창 밖으로 보이던 베이징 시내의 조용한 경치는 한 폭의 그림이나 영화 같았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그때 찍어 두었던 아래 사진들을 다시 보니 14년 전 그 시점, 그 장소로 거슬러 올라가 사무실이 있던 24층에서 베이징 시내의 조용한 경치를 감상하던 그때의 내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은 아련한 착각을 하기도 한다.
사진) 24층 사무실에서 보이는 베이징 북서쪽 모습. 중앙에 보이는 건물이 구오마오(國貿). 좌측에 보이는 건물은 당시 건축 중이었던 인타이센터(银泰中心).그 시절 베이징 공기 오염이 너무 심해 이렇게 하늘이 파랗게 보이는 날이 거의 없었는데 운 좋게 맑은 날 찍은 사진이다. (2005년 10월)
사진) 사무실에서 북동쪽으로 보이는 모습. 사진 중앙의 도로가 베이징 중심가에 있는 천안문으로 연결되는 도로다. (2006년 10월)
사진 좌측 상단 방향 5km 정도 거리에 당시 내가 거주하던 아파트가 있었는데, 그 아파트에서 회사까지 매일 아침 저 건물들 속 사이 거리를 베이징 사람들 속에 섞여 약 1시간씩걸어서 출근하곤 했었다.
사진) 17층 사무실에서 내려다본 거리. 사진 좌측에 보이는 도로가 건국로(建國路).
사진) 법인 사무실 근처 거리 모습. 사진 중앙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이 법인이 있던 '짜오샹쥐따샤' 건물이다.
영상) 14년 전인 2006년 10월에 찍은 베이징 건국로주변 모습. 2008년으로 예정된 베이징 올림픽 준비로 여기저기공사가 한참 진행 중이던 시절이었다. (01:26)
추운 겨울이 지나고 나른한 봄이 오기 시작하면 회사 근처 작은 공원이나 거리에는 점심 식사를 마친 후에 따스한 봄 햇살을 즐기기 위해 두세 명씩 무리 지어 한가롭게 산책을 하며 담소하는 직장인들이 많았다. 두터운 겨울 옷은 벗어 버리고, 보다 얇은 옷차림으로 봄날의 따스한 햇살을 맘껏 즐기던 아름다운 직장인 여성들또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나 역시 그 시절 그 공간에서는, 그들과 섞여 그들의 일부가 되어그들처럼 그 시절의 나른한 베이징 봄 햇살을 맞으며 직장인의 짧은 점심 한때의 여유를 즐기곤 했었는데 그것이 벌써 14년 전의 과거가 되어버렸고 이제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이 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