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고 나서 되돌아보면, 시진핑(習近平)이 집권한 이후에 노골적으로 '중국몽(中國夢)'을 지속해서 강조해 온 것처럼공산화 이후 오랜 기간 '중화민족의 부흥'을 도모해온 중국 공산당은 애당초 거대한 자국 시장을 중화민족이 아닌 외국기업에내줄 의사가 전혀 없었던 것이라는생각도 든다.
개혁개방 초기, 자본과 기술이 전무했던 그 당시는 어쩔 수 없이 세제혜택 등 다양한 유인책으로 외국의 기업들을 적극 유치해서 활용할 수밖에 없었을것이다. 하지만, 기술이전 강요, 중국기업과의 합작 강제화 등 사전에 계획된 교묘한 규제로 중국에 진출한 외국 기업들의 자본과 기술력을오랜 기간에 걸쳐 뽑아낸 결과이제 중국기업들의 기술력과 사업 수준이 외국 기업과 대등한 수준에 이르고 나니, 더 이상 그 외국 기업들이 필요 없게 된 셈이다.
사드(THADD)를 빌미로 한국의 유통업체를 집중적으로 압박하여 결국 철수하게 만든 것도 그렇고, 황무지 같았던 중국의 게임산업이 서서히 자리를 잡고 성장하기 시작하니 언제부턴가 한국 게임산업의 중국 진입을 노골적으로 막는 것도 그렇다. 또 아무런 로열티 없이 한류 콘텐츠를 맘대로 사용해서 자신들의 방송제작에 활용하고 있는 방송과 연예 관련 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중국의 이러한 막무가내식 자국 산업 육성 일변도 정책들은 한국 기업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 기업에 대해서까지도 오랜 기간 자행돼 왔는데, 미국 경우 트럼프가 집권한 이후 이러한 오랜 횡포에 대해 본격 반박하고 보복해서 상당 부분 개선해가고 있지만, 정치와 경제 어느 면에서도 결코 중국을 무시할 수가 없는 한국은 여전히 속절없이 당하고만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하지만 외국기업으로부터 얻어내야 할 것도 많았고, 외자 유치도 많이 아쉬웠던 과거 중국은 요즘과는 전혀 달랐다.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고용 창출이나 자본 축적, 원천 기술 확보 등 차원에서 한국 포함 외국 기업의 중국 진출을 업종 관계없이 적극 환영하던 시기가 있었다.
그 시절 그런 여건에서 특히 수출과 해외시장 의존도가 꽤 높았던 한국의기업들은 중국 정부가 제공하는 세제혜택 등 다양한 혜택 외에도, 인구 14억이라는 엄청난 중국의내수 시장 규모에 매료되어 마치 회사의 미래와 사활이 중국에만 걸려 있는 것처럼 장밋빛 꿈만을 품고 중국 진출에 총력을 다하기도 했었다.
내가 베이징에 부임하던 2005년도 역시 그러한 분위기가 팽배하던 그런 시절이었고 그때 회사가 중국 사업력 강화를 위해 대폭 확대한 중국 현지 신설 부서중 하나로 나 역시도 발령받아 부임하게 되었던것이다.
발령받은 부서가 기존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신설 부서이다 보니, 베이징 부임과 함께 사무실 공간 확보부터 시작해서 사무실 공사 및 현지 직원 채용까지도 모두 처음부터 해야 했다. 심지어 내가 속한 부서가 해야 할 일 자체도 명확하게정해지지 않아, 우리 부서의 업무범위가 어디까지이고 무슨 일을 해야 할지도 수시로 워크숍을 해 가며 정의해 나가야 했었다. 말 그대로 '맨땅에 헤딩'한다는 그런 말이 떠오르던 시절이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사 갔지만, 당시 회사는 베이징 중심 구오마오(國貿)라는 건물 인근의 자오샹쥐따샤(招商局大厦) 23~24층 두 개 층을 임대해서 사무 공간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방안을 쥐어짜 봐도 도저히 그곳에 새로 생긴 우리 부서 인력 모두를 수용할 만한 여유 공간을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우리는 몇 개 층이나 떨어진 17층에 우리만의 별도 공간을 마련해 한동안 따로 근무해야 했다.
내가 베이징에서 담당했던 첫 번째 업무는 바로 이 17층의 텅 빈 공간을 법인 총무부서 직원과 함께 사무실로 만들어 가는 일이었다. 당연히 이런 일은 특별히 복잡하게 머리 쓸 일이 거의 없는그저 오래전 군대에서 막노동하듯 인테리어 업체 직원에게 이것저것 부탁하고 요청하는 것이 대부분인 단순한 업무였다.
중국 부임하기 전 본사 스텝부서에서 머리 쥐어짜가며 끝도 없는 공허한 Paperwork이나 보고서에 시달리다, 이처럼 스트레스가 거의 없는 너무 속 편한 일을 하면서 월급은 또 매월 꼬박꼬박 받다 보니 솔직히 좀 이상하다는 느낌도 꽤 들었다.
뭐랄까, "정말 이렇게 편하게 직장 생활을 해도 되는 건가?" 하는 일종의 불안감 같은 생각이 때로는 들었던 것이었다. 노는 것도 놀아본 사람이 잘 논다고, 스트레스 없이 편하게 출퇴근하며 월급 받는 그런 시간이 길어지니 나름 불편하고 어색했다.
하지만 어느 기업체도 직원들이 그렇게 오랜 시간 편하게만 있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시간은오래 지속되지 않았고, 몇 달 뒤 사무실 공사가 완료되고부터는 바로 또다시 '종이'와 씨름하고 싸우는 그 일이 반복되었다.
17층의 임시 사무실은 20평 정도의 크지 않은 공간이었다. 하지만 부서 설립 초기 사무실을 막 오픈했던 그 당시에는 부서원이 나 포함 고작 2~3명 정도밖에 안되다 보니, 그 20평도 인원수 대비는 너무 넓어 한동안은 서로 몇 미터씩 떨어져 앉아 운동장 같이 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근무를 했었다.
사진) 입주 이전 텅 빈 상태의 자오샹쥐따샤(招商局大厦) 건물 17층 사무실 공간
사진) 공사를 완료하고 사무 집기까지 완전히 갖춘 이후의 17층 사무실 모습 (2005년 9월). 향후 충원될 부서원들을 고려하여 자리는 약 15석 정도 마련해 놓았지만, 초기에는 부서원이 달랑 2~3명뿐이라 사무실이 꽤 썰렁했다.
사무실 공사를 하면서 재미있는 경험도 했다. 그럭저럭 한 달여 기간을 거쳐 사무실 공사가 마무리가 되고 마지막으로 각 책상에 전화를 설치할 때였는데 전화를 설치하던 중국인 작업자가 내 자리 전화번호로 몇 가지 번호들을 보여 주며 그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중고등학교 6년간 내 번호가 '44번'인 경우가 '4번'씩이나 있었던 나는 '4'자를 유독 좋아했다. 그래서 '4'라는 숫자가 들어 있는 '14'로 끝나는 번호를 선택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중국인 작업자들이 선뜻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뭔가 좀 불편하다는 듯한 어색한 표정을 짓고 머뭇거렸다.
나는 그들이 왜 그러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는데, 그때 마침 옆에 있던 조선족 직원이 중국에서 숫자 '4'는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대다수가 기피하는 숫자이며, 더욱이 '14'라는 숫자는 절대 피하는 숫자라 했다.
왜냐하면 중국어로 '4(四)'라는 숫자가 한국에서처럼 죽을 '사(死)'와 발음이 비슷한데, 여기에 '1'이 합쳐진 '14'는 중국어로 발음을 하면 '야오쓰(一四)'로, 글자는 다르지만 발음으로는 "죽어야겠다"는 의미의 '야오쓰(要死)'와 같기때문이라 했다.즉 내가 택한 전화번호는 "죽어야겠다"였던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나니 나 역시도 다소 찜찜한 생각이 들어 결국 그 번호를 포기하고 다른 번호를 선택했다.
그런데 이후 좀 더 중국에서 생활하다 보니 유물론을 믿는 공산주의 사회로 중국이 바뀐 지 매우 오래되었지만 의외로 미신처럼 간주될 수 있는 숫자들에 대한 일종의 강박관념은 한국과 비교 시 너무나 심했던 것을 자주 경험할 수 있었다.
고층 건물에 '4층'이나 '14층', '24층' 등 '4'자가 들어가는 층은 아예 없다. 이처럼 '4'자는 극도로 기피하지만, 반대로 아주 선호하는 숫자도 있는데 '8(ba)'은 '번창하다'는 뜻의 단어 '發(fa)'와 발음이 비슷해서 좋아하고, '9(jiu)'는 또 장수를 의미하는 '久(jiu)'와 발음 및 성조까지 동일해 매우 선호한다.
사무공간 준비와 병행하여 베이징에서 주재 근무하기 위해 필요한 개인적인 것들도 하나하나씩 해결해 갔다. 아파트는 전편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차오양 공원(朝陽公園) 남문 근처의 쫑뤼취엔(棕榈泉, Palm Springs)이라는 아파트로 정했고, 차량은 Nissan의 Teana라는 차를 샀다. Teana란 Brand의 중문 번역은 '天籁(Tian Lai)'였는데, '하늘 또는 자연의 소리'라는 의미이니 꽤 인상적인 중국어 작명이었던 것 같다.
사진) 베이징 부임 약 한 달 뒤인 2005년 10월 2일 일요일 막 인도받은 새 차를 회사 옆에 세워 두고 찍은 사진.
한편 캐나다법인에 근무할 때도 그랬지만 중국에서도 역시 일본차를 샀는데, 한국차도 당시 이미 좋은 차들이 꽤 많이 중국에서 팔리고 있었는데 굳이 일본차만을 고집해서 연속 구매했던 점은 시간이 지나고 나니 좀 아쉬움으로 남는다.더욱이 일본차를 선택하는데 아예 추호의 망설임조차 당시 없었다는 것 역시 지나고 보니 좀 신기하기까지 하다.
국산품만 사용하자는 주장은 아니다. 특정 국가 제품만을 고집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선택이었냐는 의미다.
참고로 중국에서는 모든 외국어 브랜드명은 반드시 한자로 번역해서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이때 번역된 중국어 한자 브랜드가 영문의 브랜드와 발음이 유사하면서도 중국어로 좋은 의미를 가져야 소비자들에게 브랜드의 일관성 전달과 함께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외자 기업들은 자신의 브랜드 중국어 번역에 꽤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노력해서 꽤 성공적으로 번역된 대표적인 브랜드가 바로 '可口可乐(Coca-Cola)'인 것 같다. '可口可乐'는 그 발음도 '커코우컬러(kekoukele)'로 원래 브랜드 Coca-Cola와 매우 유사하고, 한자의 의미도 '맛있고 즐겁다'이니 중국어로도 브랜드의 일관성 및 의미가 모두가 만족스럽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베이징에서의 생활에 있어서 결국 가장 중요할 급여 통장과 현금카드, 신용카드도 만들었다. 통장은 미국 화폐(USD) 통장과 중국 화폐(RMB) 통장 두 개를 만들어야만 했는데,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급여 중 기본급은 미화 USD로 중신(中信) 은행 계좌로 입금됐고, 주재 수당은 중국 화폐 RMB로 공상(工商) 은행 계좌로 별도 입금되었던것 같다.
RMB는 현지 화폐이므로 당연히 환전할 필요가 없었지만, USD는 은행에 직접 찾아가서 환전을 해야만 했는데, 회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 1층에 마침 중신은행 지점이 있어 매달 그곳에 가서 환전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미화와 인민폐 환율이 수시로 변하다 보니, 환전할 타이밍을 잘 선택하지 못하면 환전 금액에서 꽤 큰 이득이나 손해를 보기도 했다.
사진) 베이징에서 만든 중국의 월급 통장. 왼쪽은 미국 화폐 USD 계좌, 오른쪽은 중국화폐 RMB 계좌.
사진) 베이징에서 발급받은 신용카드와 현금카드. 이 두 개 카드를 사용하며 열심히 중국전역을 돌아다니던 그 시절이 벌써 14년 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