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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카오, 포르투갈의 오래된 기억

■ 그 주재원의 서글픈 기억들 (7편 HK, Macau-28)

by SALT

해외 주재 근무 14년간의 기억을 적은 이야기

Paris, Toronto, Beijing, Guangzhou, Taipei,

Hong Kong, Macau

그리고 다른 도시들에서의 기억......



Hong Kong, Macau



28. 마카오, 포르투갈의 오래된 기억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은 1949년부터 도시명 뒷부분에 '특별시(特別市)'라는 명칭이 붙어 '서울특별시'로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런데 중국에도 역시 '특별 행정구(特別行政區)'라 불리는 도시가 있는데, '특별(特別)'이라는 한자가 갖는 의미가 중국어와 한국어 간 차이가 없음에도 중국에서 말하는 특별 행정구는 의외로 중국의 수도 베이징이 아니라 '홍콩'과 '마카오'였다. 중국에서 특별 행정구는 단지 이 두 도시가 유일하다.


사진) '특별 행정구(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공식 명칭이 새겨진 홍콩과 마카오 여권


중국에서 수도도 아닌 이 두 도시에만 '특별'이라는 단어를 굳이 적용했던 이유는 이 두 도시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 영토 안에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적용되는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영국과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수백 년간 중국에서 분리되어 자본주의 경제 및 정치 체제를 누려 왔던 홍콩과 마카오는 각각 1997년과 1999년 사회주의 국가 중국으로 반환되는 것으로 최종 합의었다. 그런데 홍콩과 마카오 주민들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갑작스러운 전환에 따라 야기될 수도 있는 정치 및 경제 체제의 혼란을 당연히 우려할 수밖에 없었고, 그런 주민을 회유하기 위해 중국은 두 지역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정책들을 적용하기로 했는데 그것이 바로 '일국양제(一國兩制)'라는 정책이었다.


일국양제는 말 그대로 '한 국가 두 개 체제'라는 의미인데, 중국이 엄연히 사회주의 국가였지만 홍콩 그리고 마카오에 대해서만은 예외적으로 두 도시가 중국에 반환된 이후에도 향후 50년간은 기존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시키고 또 매우 높은 수준의 자치권까지 보장하겠다는 약속이었다.


사회주의 국가 안에 있으면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적용되는 곳이니 홍콩과 마카오는 특별한 행정구역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결국 홍콩과 마카오 이 두 도시는 오랜 기간 중국에 남아 있던 유럽 국가의 특별한 식민지였다가 중국으로 다시 반환된 이후에는 이제 중국의 '특별한' 도시로 재탄생하게 것이다.




매년 수천만이나 되는 관광객들이 방문하는 마카오 Retail 시장은 결코 작은 시장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독립된 별개 법인을 두고 운영할 만큼 그 규모가 충분히 크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근무했던 홍콩 법인에서 인근의 마카오 시장도 겸해서 관장하고 있었다.


마카오 바로 옆의 중산시(中山市)까지 관할하고 있던 중국 본토 광저우 법인이 거리적으로는 마카오에 조금 더 근접해 있지만 전술한 바와 같은 일국양제 정책에 의거 마카오에는 중국 본토와는 다른 체제가 적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동일한 자본주의 체제하에 있던 홍콩 법인에서 마카오 시장까지도 관할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마카오는 홍콩에서 페리를 타면 1시간 만에 도착할 수 있을 만큼 거리도 멀지 않았고 언어 또한 두 지역 모두 같은 광둥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그 외에도 두 도시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오랜 기간 함께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어서 그런지 경제적으로나 인적 교류면에서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예를 들면 홍콩 영주권을 갖고 있는 주민은 여권 등 아무런 추가 서류 없이 단순히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유사한 홍콩 ID 카드만 갖고 있으면 언제든지 자유자재로 마카오를 왕래할 수 있었다.


반면 비록 홍콩 ID 카드는 있었지만 영주권이 없는 ID 카드 소지자였던 나 같은 외국인 주재원은 마카오에 입국하려면 별도로 여권을 지참해야 했었다. 다만 그럼에도 중국 본토 경우 여권 이외에도 비자를 받아야 입국이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마카오는 비자 등 일체의 추가적인 서류 없이 여권만 있으면 언제든지 입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입출국이 그다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법인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마카오에 가야만 할 일이 생기면 그저 사무실 책상 서랍에 있던 여권만 꺼내서 배 타고 가면 그만이었던 것이다. 법인에서 Ferry Terminal까지는 대략 20분, Terminal에서 마카오까지는 약 1시간 정도였으니 1시간 반이면 넉넉잡고 법인의 내 자리에서 마카오에까지 도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진) 여권에 찍힌 마카오 입출국 도장. 포르투갈어, 영어, 중국어 등 3개 언어로 표기되어 있다.


이처럼 워낙에 가까운 데다가 또 법인이 관할하는 지역이다 보니 당연히 마카오는 자주 방문했었다. 그렇지만 여행이나 관광으로 갔던 것은 아니어서 사실 몇 군데 정해진 곳 외에 많은 곳을 다녀 보지는 못했었다. 인터넷에 마카오에 가면 방문해야 할 명소 36곳을 소개하는 사이트도 있던데 그중 실제 방문한 곳을 세어 보니 5년 반이나 홍콩에 거주하면서 마카오를 그리 자주 다녔어도 채 10 곳도 안 되는 것 같다.


(마카오 명소 36곳)

https://www.google.com/amp/s/traveltriangle.com/blog/places-to-visit-in-macau/amp/




홍콩 면적은 1,106㎢로 서울 면적 605㎢ 보다 훨씬 커서 약 2배 가까이 된다. 반면 마카오는 그 면적이 약 32㎢로 꽤 작아서 서울의 송파구 면적과 유사하다. 인구 또한 홍콩은 약 750만 명으로 핀란드, 노르웨이, 불가리아, 루마니아 등 유럽의 웬만한 중소국 보다도 많았던 반면, 마카오는 고작 66만 명으로 역시 서울 송파구 1개 구와 인구가 유사하다.


하지만 인구 고작 66만 수준이었어도 마카오가 결코 작은 시장은 아니었다. 왜냐면 홍콩도 마찬가지였지만 마카오도 역시 중국인 중심으로 매년 수천만 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도박과 면세품으로 유명한 마카오까지 찾아와서 엄청나게 많은 소비를 하고 돌아가기 때문이었다.


코로나 사태 이후에는 급감했지만 그 시절 인구 66만 명의 마카오에 연간 약 3~4천만 명의 관광객이 방문했었다. 이 관광객의 약 70% 즉 약 2천만 명 정도는 중국 본토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은 도박이나 면세품 쇼핑 외에 숙박, 식사 그리고 마지막으로 떠나기 직전에는 중국 지인들에게 줄 선물 구매까지 상당한 금액을 마카오에서 소비한 이후에 중국으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서울 전체도 아니고 송파구 정도의 매우 좁은 지역에 무려 수천만이나 되는 중국인들이 몰려가서 열심히 소비를 하고 떠난다고 생각해 보면 송파구 안에 있는 상점이나 호텔들의 매출이 얼마나 크게 증가할 것인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마카오는 비록 인구 66만 명의 작은 지역이었지만 일부 제품들의 시장 수요는 인구가 3천만이 넘는 웬만한 국가와 비교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


(마카오 방문객 국적, Accessing Macau 클릭)

https://en.wikipedia.org/wiki/Tourism_in_Macau

(한국, 마카오,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중국 관광객 수)

https://m.blog.naver.com/zeuscasinoresort/222110568813


물론 아무리 많은 관광객들이 온다고 해도 그들이 자동차나 냉장고 같은 대형 제품을 마카오에서 사서 중국으로 가지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국인들이 그토록 선호했던 아이폰과 같은 핸드폰이나 일본제 DSLR 카메라 같은 작은 크기의 면세품들은 얼마든지 손으로 들고 돌아갈 수 있었기 때문에 마카오의 시장 수요가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마카오 시장 역시 우리 법인에게는 매우 중요한 시장이었다.


흔히 농담처럼 하는 말 중에 중국인 관광객이 상점에 들러, 진열돼 있는 수백 벌의 옷을 보고 서너 가지를 지정하길래 점원은 그것을 사려는 줄 알고 꺼내려했더니, 그 중국인이 말하기를 그것만 빼고 나머지 모두를 사겠다고 했다는 말을 한국에서도 종종 들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말을 홍콩이나 마카오에서도 이미 여러 번 들었었다. 특히 마카오 경우는 도박으로 너무도 유명한 도시였던 만큼 마카오를 방문하는 중국인들은 대부분 도박을 즐기려는 중국 부자들이었는데 도박하러 마카오까지 오는 중국인 부자들의 씀씀이는 일반 관광객보다는 훨씬 더 컸었다.




그런데 그렇게 중요한 마카오 시장이었지만 사실 2009년 홍콩법인 부임 초기에는 마카오는 거의 방문하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그 시절에는 홍콩에서조차도 제대로 판매를 하지 못하던 시절로 무엇보다 먼저 홍콩 시장에서의 판매 확대가 시급해 마카오는 신경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부임 초기 1~2년 간은 1년에 한두 번 정도밖에는 마카오를 방문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홍콩 문제가 상당 부분 정리가 되고 매출이 급격히 늘어나서 우리 법인의 핵심 제품 시장 점유율이 무려 50%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 2011년부터는 홍콩에서는 더 이상 매출을 늘리기가 쉽지가 않았고 따라서 본격적으로 마카오 시장에 집중해서 마카오 시장 매출 확대에 주력했었다.


그리고 마카오 시장에 대한 그러한 각오를 새롭게 다진다는 의미에서 영업인력 평가에 마카오 매출 비중 항목을 새롭게 반영하기도 했다. 또 법인의 전 간부가 모여 차년도 전략을 협의할 때 그 장소를 마카오로 정해 마카오에서 그 회의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아래 사진이 바로 그때의 회의 사진으로 마카오 시내 소피텔 호텔에 1박 투숙하며 2012년 새해의 홍콩 및 마카오 판매 전략을 협의하던 모습이다. 홍콩 시내 호텔도 너무나 많은데 굳이 마카오에까지 가서 전략 회의를 하자고 했더니 홍콩인 간부들 모두 시큰둥한 모습을 보였던 것도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렇게 억지로라도 마카오 시장에 관심을 갖게 했던 덕분이었는지 어쨌든 그 해의 마카오 매출은 크게 늘어났고 법인 전체 매출 또한 꽤 의욕적인 목표를 수립했음에도 그 목표를 초과해 달성했다. 게다가 본지사 연계 이익률 또한 무려 매출액의 50% 가까이 달성하는 성과를 낼 수 있었다. 100원 팔면 40~50원이 이익이었다는 말이다.


사진) 마카오에서 진행된 법인의 2012년 전략 회의 모습


(전략 회의를 실시했던 소피텔 호텔 거리뷰)

https://goo.gl/maps/krGDhntzCvR8e3ed9


이렇게 마카오 시장 공략을 본격화하면서 전담 영업인력 및 정식 Retail 거래선 모두 전무했던 마카오에 오직 마카오만 전담하는 영업인력도 새로 채용했고 또한 마카오 내 Retail 유통망을 갖고 있는 3~4개 거래선도 확보해 법인과의 거래 계약을 체결한 후 제품도 본격적으로 공급하기 시작했다.


아울러 나 자신부터 부임 초기와는 달리 적어도 최소 매달 1번 정도는 꼭 마카오를 방문해 시장 상황을 보고 거래선도 만나고 오곤 했으며, 이후 마카오 매출이 점차 늘어가자 오직 우리 제품만 취급하는 Brand Shop도 홍콩과 별도로 마카오에 3~4 군데 오픈해서 운영하기도 했었다.


그 당시 마카오의 뜨거운 태양 아래 때로는 주변을 지나는 한국인 관광객들과도 마주치면서, Brand Shop 선정 대상 매장들을 보러 마카오 거리 여기저기를 헤매고 다니던 일이 기억난다. 아래 사진이 그렇게 헤매고 다닐 때의 사진인데, 법인 실적에 목매달고 살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라서 그런지 사진 속 내 얼굴 표정이 모두 경직돼 있거나, 짜증스럽거나 그것도 아니면 피곤함만이 가득해서 세 장의 사진들을 함께 보니 마치 한때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TV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도 등장했던 예전의 '못난이 3형제' 인형들을 다시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사진) 직원들과 마카오 Brand Shop 보러 다닐 때의 모습. 오른쪽 끝 사진이 마카오 최대 관광 명소라는 St. Paul 성당 앞에서 찍은 사진인데 워낙 인파가 많은 곳이라 그런지, 이 근처의 매장 임대료는 환상적이라 할 만큼 비쌌다. (2013. 10월)


('응답하라 1988'에 등장했던 인형 '못난이 3형제')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ocienews&logNo=220565400673&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마카오는 이처럼 법인 부임 1년 여가 넘어서야 본격적으로 방문하게 된 도시였는데, 마카오 역시 중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이니 당연히 중국적 분위기가 가장 뚜렷하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과거 중남미 출장 다니면서 느꼈던 라틴적 분위기도 일부 느껴지기도 했던 것 같았다. 홍콩에서도 딱 잘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영국적 분위기가 곳곳에 스며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었는데 그것과 유사한 느낌이었던 것 같다.


하긴 홍콩이 155년이라는 긴 시간 영국 지배를 받아왔지만 마카오는 그보다도 훨씬 긴 무려 442년간 포르투갈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라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모두 라틴국가로 불리기도 하는데 오랜 기간 동안 중남미 대륙을 식민지로 분할해서 지배했던 두 국가들이 중남미에 남겼던 라틴적인 분위기들을 역시 그만큼 오래된 포르투갈의 동아시아 식민지 마카오에도 남겼던 셈이다.


이제는 인구 약 천만의 중소국으로 전락했지만, 사실 과거 한때 포르투갈은 중남미 대륙의 광대한 브라질 포함, 인도, 아프리카, 아시아 등 전 세계 곳곳에 자신들의 해외 영토를 보유하고 있던 강대국 중 하나였다. 지구를 돌아 일주하는 항해를 처음으로 성공해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실질적으로 증명한 마젤란(Magalhães)이나, 희망봉을 거쳐서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최초로 개척했던 바스코 다 가마(Vasco da Gama) 모두 당시의 해상 강국 포르투갈 출신이었다.


(과거 포르투갈의 전 세계 식민지)

https://en.wikipedia.org/wiki/Portuguese_Empire#/media/File:All_areas_of_the_world_that_were_once_part_of_the_Portuguese_Empire.png


그처럼 광대한 식민지를 갖고 있었던 포르투갈이 동방 무역 거점을 중국의 남부에도 하나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마카오'였던 것이다. 물론 마카오가 공식적으로 포르투갈 식민지가 된 것은 인근에 있는 홍콩이 영국의 식민지가 된 1842년보다 45년 후인 1887년부터다.


하지만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집단적으로 거주해왔던 것은 이보다는 훨씬 전인 1500년대 명나라 시절부터였다. 이미 1557년에 포르투갈인들은 명나라에 일종의 임대료와 같은 비용을 지불하고 마카오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서 거주했던 기간은 무려 450년 가까이 되었던 셈인데, 그 사이 중국은 명나라에서 청나라를 거쳐 다시 중화 인민공화국으로 국가가 세 차례나 변경되기도 했었다. 그만큼 마카오는 포르투갈인의 오래된 동방 터전이었고 거점이었던 셈이다.


(1598년경의 Macau 모습을 묘사한 그림)

https://en.wikipedia.org/wiki/Portuguese_Macau#/media/File:Amacao.jpg

(1813년 Macau 모습)

https://www.alamy.com/stock-photo-warehouses-and-post-of-macau-in-1813-macau-an-official-port-for-international-32374138.html

(1800년대 Macau 모습)

1. https://www.pinterest.at/pin/327355466665551004/

2. https://wellcomecollection.org/works?query=%22Macau+%28China%29%22


생각해 보면 너무도 오래된 사건처럼 여겨지는 임진왜란이 발생한 것도 1592년인데, 마카오에 포르투갈인들이 집단 거주해 온 것은 그보다도 35년이나 빠른 1557년부터이니 정말 얼마나 오래전부터 포르투갈인들이 마카오에 거주해 왔었는지 새삼 이해가 되는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그러한 오랜 역사가 우리가 겪은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기록에 등장하기도 한다. 조선에게는 공포의 무기였던 일본군 조총의 제조 기술을 일본에 전해준 것도 포르투갈인이었고, 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을 목격했던 포르투갈인 신부의 기록도 남아 있는 것이다.


마카오에 거점을 두고 있던 포르투갈이 오래전부터 중국뿐 아니라 일본, 한국 등 동아시아 역사 곳곳에 때로는 너무도 깊이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 임진왜란이란 역사를 통해서도 다시 한번 증명되었던 셈이다.


(포르투갈 신부가 본 임진왜란)

https://www.dom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649656

(임진왜란과 포르투갈)

https://blog.daum.net/kanghan8/15959880




홍콩은 한자로는 '香港'으로 표기되는데 중국 표준어로 그 발음은 'Xianggang(샹강)'이다. 하지만 전 세계 어디서도 '홍콩'을 '샹강'이라고 부르는 나라는 없다. 왜냐하면 홍콩 언어인 광둥어로 '香港' 발음은 'Hongkong(홍콩)'인데 이 광둥어 발음이 표준어 발음보다 먼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홍콩의 공식 지명으로 굳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역시 광둥어를 사용하는 인근 마카오의 지명 유래는 홍콩과는 그 경우가 전혀 달랐다. 마카오는 중국어로는 '澳門'으로 표기되고 표준어 발음은 'Aomen(아오먼)'이다. 아울러 현지 광둥어로 발음해도 'Oumun(오우문)'으로 두 발음이 서로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불리는 지명은 '마카오(Macau, Macao)'였다. 중국 표준 발음이나 광둥어 발음 어느 것과 비교해도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뿌리가 없는 엉뚱한 이름이 마카오의 공식 지명이 된 셈인데, 이렇게 된 배경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있다고 한다. 즉, 포르투갈인들이 16세기 중반 처음으로 마카오에 왔을 당시 중국인들에게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그곳에 있던 중국인들은 마침 그들이 서 있던 곳이 '마각(媽閣)' 사당의 바로 앞이라서 사당 이름을 묻는 걸로 오해를 해서 '媽閣'의 광둥어 발음인 '마콕(Ma Kok)'이라고 답변을 했고 이것을 포르투갈인들이 그 지역 이름으로 받아들이면서 마카오의 지명으로 굳어진 것이라 한다.


사진) 마카오의 '마각(媽閣)' 사당 정문. 1500년대 중반에 포르투갈인들이 여기가 어디냐고 질문한 곳도 바로 이 근처 어디였을 것이다. (2011. 1월)


('澳門(마카오)'의 광둥어 및 표준어 발음)

https://fanyi.baidu.com/translate?aldtype=16047&query=%E6%BE%B3%E9%96%80&keyfrom=baidu&smartresult=dict&lang=yue2zh#yue/zh/%E6%BE%B3%E9%96%80


('媽閣' 광둥어 발음)

https://fanyi.baidu.com/translate?aldtype=16047&query=%E5%AA%BD%E9%96%A3&keyfrom=baidu&smartresult=dict&lang=yue2zh#yue/zh/%E5%AA%BD%E9%96%A3


마카오는 또 알파벳으로는 Macau와 Macao 두 가지 다른 철자로 표기되기도 하는데, 포르투갈어로 표기되는 마카오 공식 명칭은 Macau가 맞다고 한다. 다만 영어가 모국어인 국가에서는 Macao로도 표기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결국 두 가지 표현 모두가 맞는 것으로 본다고 한다.


(Macau/Macao?)

https://www.visitmacao.com.au/macao-tourism-blog/faq/is-it-macau-or-macao/




마카오의 공용어는 중국어와 포르투갈어 두 가지다. 하지만 영어가 홍콩에서 오랜 기간 공용어로 사용되어 왔고 홍콩이 중국에 반환된 지 20년이 넘는 현재도 홍콩인들 사이에서 아직은 폭넓게 사용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포르투갈어 역시 너무도 오랜 기간 마카오의 공용어였음에도 마카오 인구의 절대다수였던 중국인들이 포르투갈어를 구사하는 경우는 좀처럼 볼 수 없었다.


마카오 주민의 오직 2% 정도만이 포르투갈어를 구사할 수 있다는 분석도 있는데, 최근에는 학교에서조차 포르투갈어 교육을 하지 않는 곳도 많다고 한다. 하지만 포르투갈어가 엄연히 공용어이다 보니 거리의 도로 표지판의 표기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모두 중국어 외에 포르투갈어도 항상 함께 표기되어 있었다.

사진) 마카오 거리의 도로 표지판. 중국어 외에 포르투갈어 지명도 함께 표기되어 있다. (2011. 1월)


첫 번째 사진 지명 : Travessa dos Faitiões,

두 번째 사진 지명 : Patio da Claridade


(첫 번째 사진과 동일 장소 거리뷰)

https://goo.gl/maps/2XbTkjBEf7qS976C6

(두 번째 사진 인근 지역 거리뷰)

https://goo.gl/maps/uPu8u8EkbYwCzjWw8


거리의 도로 표지판 이외에도 포르투갈의 오래된 흔적을 볼 수 있는 것들이 마카오에는 또 남아있었는데 그것들은 바로 포르투갈인들이 1500년대부터 건축해온 꽤 오래된 유럽풍 건축물이었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당연히 아래 사진에 보이는 '성 바울 (Saint. Paul) 성당'일 것인데, 이 성당은 1602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1640년에 완공되었다 하니 그 역사가 무려 400년 가까이 되는 건축물인 셈이다. 하지만 이 거대한 성당은 1835년에 발생한 화재로 건물의 대부분이 소실되었고 현재는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건물 전면 부분만 남아 있다.

사진) Saint. Paul 성당 건물 전면 모습 (2011. 1월)


한편 이 성당 영문 이름 Saint Paul을 원래의 포르투갈어로 표기하면 'São Paulo(상파울루)'가 되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이름이 인구 1200만의 브라질 최대 도시 '상파울루'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두 이름이 같은 이유는 브라질의 도시 그리고 이 성당 모두 한글로는 '바울'로 번역이 되는 기독교 초기 성자 '사도 바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포르투갈어로는 성자(聖者)를 의미하는 단어인 São은 영어로는 Saint로, 포르투갈어 Paulo(파울루)는 영어로는 Paul(폴)로 표기되니, São Paulo가 영어로는 Saint(St.) Paul로 번역된 것이고 이 번역된 영어 이름이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상 파울루'와 '세인트 ', '사도 바울'은 모두 같은 의미인 것이다.


St. Paul 성당 주변에는 역시 이 성당만큼 유명한 포르투갈 풍이 물씬 풍겨 나는 Senado란 아름다운 광장도 있었다. 이 광장도 1500년대부터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 광장 끝에 'Leal Senado'라 불리는 일종의 의회와 유사한 건물이 있었기 때문에 이 광장도 그런 이름을 따서 Senado 광장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다.


포르투갈어 'Senado'는 영어에서는 원로원이나 상원 등을 의미하는 'Senate'와 그 어원이 같은 단어이며 또 'Leal'은 충성스럽다는 의미라고 한다. 결국 이 건물은 '충성스러운 의회'라는 의미를 가진 건물이었던 셈이.

사진) Senado 광장에서 찍은 사진 (좌측 2013. 7월, 우측 2010. 9월)


(Senado 광장 소개 볼로그)

https://blog.naver.com/bbangrock3/221793726577

(Leal Senado 소개 블로그)

http://m.blog.daum.net/kieury/11295669


마카오는 마카오 반도, 타이파 섬, 콜로아네 섬, 그리고 두 섬 사이를 매립한 코타이로 구성되어 있는데 포르투갈인이 가장 많이 거주했던 마카오 반도에는 특히 오래된 유럽풍의 건물들이 많이 몰려 있었다. 아래 사진에 보이는 전형적인 포르투갈 스타일 건물도 지인과 함께 식사를 위해 찾아갔던 레스토랑이 있던 건물인데 역시 마카오 반도에 있었다. 이 레스토랑은 영화 도둑들에도 배경으로 등장했었다.

사진) 포르투갈풍 스타일의 레스토랑 건물 (2014. 5월)


( 레스토랑 소개 블로그)

https://m.blog.naver.com/lovedoremi/221564115072


이 레스토랑에서 어떤 음식을 먹었는지에 대한 기억은 이제 전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오래된 돌로 된 바닥에 중앙에 작은 광장도 있던 아름다운 이 건물에서 풍겨 나오남국 도시 마카오의 애틋한 정취와 여유는 지금도 기억에 뚜렷이 남아 있다. 다시 마카오를 갈 기회가 또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사진 속 저 공간으로 다시 돌아가 약 7년 전 여름에 그랬던 것처럼 또다시 와인 한잔과 함께 멋진 식사를 음미해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다시 이곳에서 식사를 하게 된다면 이번에는 매출과 손익 또 이외에도 항상 뭔가로부터 쫓기며 살았던 것 같은 그 시절보다는 훨씬 여유롭고 낭만적인 식사를 할 수가 있을 것 같다. 한국에서도 한때 꽤 인기 있었던 감미롭지만 슬픈 가사를 가진 오래된 포르투갈 노래 Barco Negro와 같은 노래도 오랜만에 다시 들으면서 말이다....


(Barco Negro, 검은 돛배)

https://youtu.be/bKmCib5YsYo

(노래 가사 번역)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faithls&logNo=220924252893&proxyReferer=https:%2F%2Fwww.google.co.kr%2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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