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27대 임금이자 또 마지막 임금은 순종이었다. 순종 이전 26대가 고종이며 그 이전 25대는 철종이었다. 그리고 철종 이전의 24대 임금이 헌종이었다. 바로 이 헌종이 조선 왕조 재위에 있던 기간은 1834년부터 1849년까지였는데 헌종이 이 땅의 임금이었던 그 시절은 지금으로부터는 정말 까마득한 옛날로 느껴진다.
그런데 홍콩은 헌종이 조선의 임금이던 시절 즉 1842년에 이미 영국령 식민지가 되었다. 그 까마득한 시절부터 벌써 홍콩은 중국이 아니라 유럽 국가 영국 영토였던 것이다.
그만큼 영국의 홍콩 지배 역사는 오래됐다는 의미인데 이후 홍콩이 중국으로 반환된 시점이 1997년이니 홍콩은 무려 155년간 영국 식민지로 있으면서 정치, 문화, 경제 등 사회 모든 면에서 영국의 직접적 영향 하에 있었던 셈이다.
그렇게 장기간 영국 영향을 받았으니, 그 당시 영국인들이 홍콩에 남긴 것들이 지금도 홍콩 사회 곳곳에 여전히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런 것들 중에는 중국 본토와 크게 다른 사회 시스템처럼 무형적인 것들도 있지만 식민지 시절 건축된 유럽풍 건축물처럼 눈에 보이는 유형적인 것들 또한 있었다.
그런데 홍콩을 홍콩답게 보이게 만드는 것들 중에는 이러한유형적인 유럽풍 건축물 또한 나름 꽤 큰 비중을 차지할 것 같기도 하다. 왜냐면 유형적 건축물 또한 결국에는 사람의 정신과 심리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홍콩이 중국의 여타 도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중국과 유럽이 묘하게 혼재된 독특한 도시 감각을 갖게 된 배경에는 식민 시절 건축된 이 오래된 유럽풍 건물들도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증명하는 학문도 있는데 새롭게 떠오르는 학문 중에는 '신경 건축학'이라는 학문이 있다고 한다. 이 학문에 의하면 건축 디자인은 본연의 주거 용도 이외에도 사람들의 정신과 심리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2009년에서 2014년 홍콩에 거주하던 기간에 홍콩인들의 정신과 심리 그리고 문화에 많은 영향을 끼쳤을 식민 시절 건축된 오래된 유럽풍 건축물들과도 종종 마주치곤 했는데 그렇게 마주쳤던 건축물들에 대한 기억을 당시 찍은 사진과 함께 글로 옮긴다.
1) Yau Ma Tei (油麻地) 경찰서 (1922년)
어느 일요일 아침 산책하면서 구룡역에 있던 집에서 나와서 무작정 북쪽 방향으로 걸어가다 보니 꽤 큰 규모의 오래된 유럽풍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경찰서였는데 검색을 해 보니 영국의 식민통치 시절 약 100여 년 전 1922년에 건축된 Yau Ma Tei 경찰서였다.
이 건물을 사용하던 경찰서는 2016년 최신식 신축 건물로 이전했다 한다. 하지만 내가 이 건물과 마주쳤던 2010년도 그 당시에는 이 건물이 여전히 경찰서로 사용되고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경찰서 건물은 1945년 건축된 종로 경찰서와 혜화 경찰서라 하는데 그 건물들보다도 23년이나 더 오래된 건물이 100년 가까이 경찰서로 여전히 사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 건물과 처음 마주쳤을 때는 그렇게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잔잔한 건축미를 느낄 수 있었는데,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건물 주변의 긴 회랑 역시 꽤 인상적이었다. 건물 외관에서 풍기는 아름다움만 보면 흉악한 범죄인들을 다루는 험악한 분위기의 경찰서라기보다는 차라리 도서관이나 박물관과 같은 역할이 더 어울리는 건물 아니었나 싶다.
이 경찰서 건물은 비슷한 시기에 건축된 또 다른 경찰서인 Wan Chai 경찰서와도 그 외관이 흡사한데, 두 건물 모두 주변의 밋밋한 건물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오래된 유럽풍 스타일의건물이었다. 한편 Wan Chai 경찰서는 1932년 완공되었다 하니 Yau Ma Tei 경찰서가 그 건물보다는 약 10년 정도 먼저 건축된 셈이다
이 두 건물 모두 경찰서로서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났고, 홍콩 정부로부터 문화재로 인정되어 문화재로서 관리되고 있다 한다. 영국이 홍콩을 식민 통치하던 시절 이 경찰서 안에서 수많은 홍콩의 사건과 범죄들이 다루어졌을 것인데 그 많은 역사의 기억을 뒤로하고 이제 전혀 새로운 역할을 맡게 된 셈이다.
2) Wan Chai (灣仔) 우체국 (1913년)
한동안 Wan Chai에 있는 Queen's Cube라는 아파트에 거주했던 적이 있다. 이 아파트 옆에도 꽤 오래된 건축물이 하나 있었는데 마침 이 건축물이 근처에 있던 마트로 가는 길 중간에 있어 장 보러 갈 때마다 자주 마주치곤 했던 그런 건물이었다.마트 오가며 그저 오래돼 보인다고만 생각했던 건물이었는데 나중에 검색해 보니 식민지 시절 우체국으로 사용되었던 이 건물 또한 1913년 완공된 건물로 100년도 넘는 역사를 갖고 있었다.
사진) Wan Chai 우체국 모습 (2009. 2월)
이 건물 외관을 보면,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지붕만은 분명히 중국식 스타일로 보였다. 하지만 이 지붕을 제외한 나머지 창문이나 출입문, 벽 등의 부분은 누가 봐도 완연한 유럽풍 스타일이었다. 영국이 지배했지만 주민들 대다수는 중국인이었던 영국령 홍콩의 현실처럼 유럽풍과 중국풍이 모두 묘하게 혼재된 전형적인 '홍콩스러운' 건물이었던 것 같다.
이 건물 역시 1990년에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1992년에는 우체국으로서의 기능은 폐지되었으며 이후에는 홍콩 정부 환경보호국 산하 홍보 시설로 운영되고 있다. 오가며 건물 외관만 보았고 단 한 번도 내부로 들어가 본 적은 없었는데, 아래 블로그를 통해 내부 모습을 보니 내부 또한 아담하게 잘 꾸며져 있는 것 같았다.
마트에 장 보러 가며 자주 마주쳤던 정겨운 건물이었는데 이 색을 무슨 색이라 부르는지도 잘 모르겠지만 창틀 색이 좀처럼 보기 드문 색이라 인상적이었던 기억도 있다.
Sheng Wan에서 Mid-Levels로 가는 길 중간쯤에 Cain Lane이라는 거리가 있었다. 이 거리 근처에는 식민지 시절 건축된 유럽풍 스타일의 건물이 꽤 많이 밀집되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아래 사진에 보이는 '홍콩 의학 박물관'이었다. 이 건물은 1906년 완공되었다 하니 일본이 한국의 주권을 빼앗아간 1910년의 '경술국치'보다도 4년 더 먼저 완공된 건물로 115년이나 된 건물이다.
당초 이 건물은 홍콩 최초의 박테리아 연구소로 사용되었다 한다. 그 당시 이 건물은 3개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그 3개 블록은 각각 연구동 및 숙소동 그리고 실험용 동물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하지만 이후에는 홍콩 정부 문서 보관 창고로 사용되는 등 몇 차례 용도 변경이 있었고, 1990년 문화재로 지정된 이후 1995년부터는 현재의 용도인 의학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이 건물은 1874년 홍콩에서 사업을 시작한 Leigh & Orange라는 영국계 설계 사무소가 디자인한 건물인데, 이 설계사무소는 창업 이후 147년이 경과한 지금도 꾸준하게 사업을 지속하고 있으며 그 오랜 기간 이 건물 외에도 홍콩대학교 본관과 장국영이 자살한 곳으로 유명한 Mandarin 호텔 등 홍콩 곳곳의 역사적 건축물 다수를 설계했다 한다.
조선시대 사건인 임오군란이발생했던 해가 1882년인데, 역사책에서 배운 그 임오군란보다도 8년이나 먼저 설립된 설계회사가 오늘날까지 사업을 지속하고 있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들고 부럽기도 한 것 같다. 한국 땅위에 임오군란 당시의 기업이 지금까지도 살아남아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것과 비교하면 꽤나 다른 현상인 것 같다.
4) 손문 기념관 (1914년)
홍콩 의학 박물관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에는 식민지 시절에 건축된 또 다른 오래된 유럽풍 건물이 있었다. 바로 근대 중국의 국부라는 '손문'을 추모하는 손문 기념관인데, 이 건물 또한 1914년에 완공된 건물로 그 역사가 100년도 넘는 건물이었다.
손문(孫文)은 좀 특이하지만 상호 적대관계에 있는 중국과 대만 양국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다. 심지어 두 국가 모두 오직자신들만이 손문의 정신을 정통 계승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손문을 자신들의 국부(國父)로 내세우기도 한다. 그 이유는 그가 1911년에 신해혁명을 일으켜 봉건 왕조인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오로지 국민만이 국가의 주인이라는 '삼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중국 최초의 공화국을 수립한 영웅이라는 점을 양 국가에서 모두 인정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실 이 건물은 당초 건축될 당시는 일반 대중에게 개방되는 기념관 건물이 아니었고, 'Ho Kom Tong(何甘棠, 하감당)'이라는 중국인 부호가 자신이 거주할 주택으로 건축한 개인용 주택이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이 건물 자체는 지금도 'Kom Tong Hall'이라고 불리고 있다. 성이 'Ho'씨고 이름이 "Kom Tong'이라는 사람의 이름 부분만 따서 그렇게 불리게 된 것이다.
이후 1960년에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라는 긴 이름을 가진 종교 단체가 이 건물을 구매한 후 그들의예배당으로사용해오다 2004년 홍콩 정부에 매각했고 홍콩 정부는 이 건물을 보수하여 2006년부터는 손문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100년이 넘는 기간에 걸쳐 이 건물은 중국인 부호 개인 주택에서 예배당을 거쳐서 결국 기념관으로 변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손문이 활동하던 당시의홍콩은 엄연히 영국의 식민지 영토였는데 그런 홍콩이 손문 기념관까지 건립해야 할 만큼 손문이 홍콩과 깊은 연관이 있는지는 사실 좀 의문이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손문은 1883년17세 어린 나이에 이미 홍콩으로 와서 고등 교육을 받은 후, 홍콩최고 명문 대학인 홍콩 의과대학교전신 '홍콩 서양 의학원'에서 의학 교육을 받았고이후 1892년에는 정식으로 홍콩의사 면허까지도 취득했다.
또한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뜻을 같이하는 지인들과 만나서 외세의 침략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된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혁명에 대한 꿈을 굳혀 간 곳도 홍콩이었다. 결국 손문에게 있어서 홍콩은 중국의 여느 도시보다도 가장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었던셈이다.
한편, 이 박물관의 영문 이름이 우리에게는 좀 생소한 'Sun Yat-sen'으로 표기된 이유는 손문 경우 혁명 활동을 하며 도피 생활을 하느라 이름이 6~7개에 달할 정도로 많았다고 하는데, 이 이름도 그중 하나로 홍콩 거주 시 주로 사용했던 손일선(孫逸仙)이란 이름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었다. 한자 '逸仙'은 표준어로 읽으면 'Yi-xian(이시엔)'이지만, 홍콩 언어인 광둥어로 읽으면 'Yat-sen(얏선)'으로 발음되는데 그 발음으로 박물관 이름을 표기한 것이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상호 적대관계에 있는 중국과 대만 모두 영웅시하는 손문의 기념관은 홍콩뿐 아니라 당연히 중국과 대만에도 존재하고 있다. 중국 경우는 손문의 고향 인근에 있는 중국 남부 최대 도시 광저우에 기념관이 있으며, 대만 경우는 타이베이시에 약 12만 제곱미터라는 엄청난 규모의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싱가포르와 마카오에도 역시 또 다른 손문 기념관이 조성되어 있으니 중화권 사람 모두의 그에 대한 깊은 존경과 애정을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침사추이 Ferry Terminal 근처에는 약 136년 전 1884년 완공된 건물도 있었다. 역시 영국이 홍콩을 통치하던 시절 해양 경찰의 본부로서 사용되었던 건물인데, 해양 경찰청은 1996년 Sai Wan Ho의 건물로 이전할 때까지 이 건물을 112년간이나 본부로 사용했었다.
해양 경찰청이 이전된 이후 이 건물은 대대적 보수 공사를 거쳐 2009년에는 호텔과 고급 상점들이 가득한 쇼핑몰로 재탄생하게 되었다. 이때 건물 이름도 현재와 같이 '1881 Heritage'로 바뀌었는데 안타깝지만 정면에서 제대로 이 건물을 찍은 사진은 분실했고 아래와 같이 외곽에서 찍은 사진만 있는데, 아래에 이 건물을 소개하는 블로그에 보면 멋지고 고풍스러운 이 건물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이 건물 외부에는 아래 사진에 보이는 것처럼 꽤 큰 나무가 건물 주변 외벽에 붙어 자라고 있었는데 이렇게 큰 나무가 벽에 붙어서 자라는 모습이 신기하기도 했었다. 홍콩이라는 곳이 고온다습한 아열대 지방이라서 벽에 붙어서도 나무가 이렇게 크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 건물을 소개한 아래 블로그를 작성하신 분도 이런 나무가 신기했는지 역시 비슷한 언급을 하시기도 했다.
사진) 1881 Heritage 외벽 모습 및 그 벽에 붙어서 자라던 대형 나무 (2009. 2월)
홍콩은 역시 명품 쇼핑으로 유명한데, 이 건물도 쇼핑몰로 바뀐 이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 매장이 다수 입주하고 있어서 명품을 찾아 홍콩에 오는 사람들에게는이 건물은 한 번쯤은 꼭 와 봐야 하는 그런 명소가 되어 있기도 했다.
100년 이상 총, 칼 등 다양한 무기로 무장한 해양 경찰들이 가득했을 것이고, 온갖 흉악한 범죄자들도 역시 이 건물로 잡혀 왔을 것이며 또 지금도 그 유적이 일부나마 남아 있는 것처럼 이 건물에는 대포 등 다양한 무기가 과거 오랜 기간 가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한때 그렇게 무시무시했던 경찰청 본부가 이제는 그저 홍콩의유명한 쇼핑 명소로 탈바꿈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건물의 운명도 꽤 특이한 것 같기도 하다.
한편 이 호텔은 전술한 바와 같이 1884년에 완공이 되었다 그렇지만 쇼핑몰 이름은 엉뚱하게도 1884가 아니라 1881 Heriatage였다. 이 불일치가 내게는 나름 오랜 기간 꽤 큰 의문이었는데 어렵게 찾아낸 자료들에 의하면 완공 시점이 1884년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착공한 시점은 1881년이라 그렇게 작명했다고 한다.
중국 본토에서처럼 홍콩에서도 '죽는다'는 한자와 발음이 유사한 4자를 워낙 싫어해 홍콩의 최신식 초고층 건물에도 4층이나 14층, 24층 등 4자가 들어간 층이 아예 없을 만큼 홍콩인들은 4자를 기피한다. 이 건물 역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건물명에 4자가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완공일 대신 굳이 착공일을택해서 건물 이름을 작명했던 것이다.
국제적인 금융 도시며 또 최첨단 도시라는 홍콩이었음에도 단지 4자가 들어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완공일이 아니라 착공일을 기준으로 건물 설립년도를 계산하는 꽤나 해괴한 계산법까지도 탄생했던 셈이다.
6) 대법원(終審法院) 건물 (1912년)
홍콩 Central 지역에는 영국 식민 통치 시절 한국 대법원과 유사한 기능을 했던 'Supreme Court'가 사용했던 건물도 있었다. 이 건물은 1900년에 공사가 시작돼서 12년 후인 1912년에 완공됐는데,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주연으로 출현했던 영화 '영웅본색'에서 그가 멋지게 담배를 피우던 장면의 배경으로 이 건물이 등장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 건물은 일본이 홍콩을 점령했던 2차 대전 당시의 약 4년간은 홍콩 주둔 일본 헌병대 본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1985년부터는 한국 국회에 해당하는 홍콩 입법회 건물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2011년 입법회가 신축 건물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다시 대법원 용도로 복원되었다.
한편 이 건물은 법원이나 입법회로 사용되었던 것 외에 또 다른 특이한 용도로도 사용되고 있었는데 바로 30만 명도 넘는 동남아 출신의 가사도우미들이 주말에 휴식을 즐기는 장소로도 유명했던 것이다.
아래 사진에서도 건물 1층 주변에 편하게 자리를 잡고 쉬고 있는 그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때로는 이보다도훨씬 많은 도우미들이 이곳에 앉아 있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이 건물에서 멀지 않은 HSBC 건물의 1층도 역시마찬가지로 주말에는 그녀들에 의해서 완전히 점령되다시피 한 모습이 매주 연출되곤 했었다.
사진) 홍콩 시내의 대형 건물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홍콩 거주 외국인 가사도우미들 모습. 좌측은 HSBC 건물, 우측은 대법원 건물이다. (2009. 7월)
과거 한국이 가난하던 시절 많은 한국인들이 돈 벌기 위해 일자리조차 없던 한국을 훌쩍 떠나 독일에 광부나 간호사로 가서 독일인들이 기피하는 온갖 궂은일들을 대신했었고 또 이후에는 중동에 근로자로도 파견돼 갔던 것처럼, 홍콩에도 필리핀, 인니 등 동남아시아에서 온 여성들이 홍콩 가정에입주해 숙식을 해가면서 가사도우미로 일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던 것이다.
그녀들의 노동의 대가는 너무도 미미해서 2020년 기준 월 70만 원 수준의 낮은 보수를 받았다. 하지만 일자리가 없고 물가와 인건비가 낮은 동남아에서는 이 돈조차도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기 때문에, 낮은 보수와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 그 많은 동남아 여인들이 가사도우미로라도 일해서 고향에 돈을 송금하기 위해 꾸준히 홍콩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다행히 한국은 기적과 같이 과거의 가난에서 벗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그 결과 이제는 험하고 위험한 일 하러 한국인이 해외에 집단적으로 이주를 하는 경우는 전혀 없으며 오히려 반대로 한국 내 험한 일자리에 동남아 출신 등 외국인들이 와서 한국인 대신 일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동남아시아 국가 등 대부분의 제3 세계 국가들은 과거의 가난이 지금도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보니 이처럼 홍콩 같은 먼 곳에까지 와서 홍콩인들이 피하는 험한 일을 대신해가며 돈을 벌어야 하는 모습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었다.
동남아에서 온 가사도우미들은 법적으로 주말에는 반드시 쉬도록 되어 있는데, 고향에 대부분의 월급을 송금해 가진 돈도 많지 않을 뿐 아니라 홍콩의 물가가 동남아 대비 너무 비싸서 주말에 집 밖으로 나와도 마땅히 갈 곳이 없다 보니 시내에 있는 대형 건물 그늘 아래나 빅토리아 공원 같은 곳 바닥에 앉아 하루를 소일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그러한 그녀들의 수가 무려 30만 명도 넘다 보니 주말에는 거리가 온통 그녀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던 것이다.
전 세계 어느 국가를 봐도 아무리 국가가 가난해도 그 국가 지도층은 거의 대부분 호의호식하며 매우 잘 산다. 따라서 국가가 가난하면 결국 그 가난의 짐은 오로지 힘없는 일반 국민들이 지고 일반 국민들만이 고생할 수밖에 없는 사실은 동서고금을 떠나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 같다.
법인이 있던 Wan Chai 지역에는 133년 전인 1888년에 건축된 건물도 있었다. 이 건물도 역시 2007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서 홍콩의 가장 유명한 최고급 레스토랑 중 하나로 재탄생되었는데 재미있는 점은 이 레스토랑 이름이 전당포를 의미하는 영어 'The Pawn'이라는 것이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이름이 붙게 된 이유는 원래 이 건물에는 '和昌(Woo Cheong)'이라는 대형 전당포가 꽤 오랫동안 영업을 해왔는데, 그 전당포가 워낙에 유명하다 보니 새로 입주한 레스토랑도 그 이름을 그대로 채택해서 레스토랑의 이름으로 정했던 것이었다. 부임 초기 한때 이 건물 바로 옆 서비스 아파트에 약 한 달여간 체류한 적이 있어 아파트를 오가며 거의 매일 마주쳤던 건물이었는데, 사실 그때는 이 건물이 그렇게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인지 몰랐었다.
사진) 레스토랑 The Pawn 건물 모습. 이 건물 바로 옆의서비스 아파트에 거주할 때 찍은 사진 (2009. 2월)
발코니도 있는 이 건물은 분명 유럽풍의 느낌이 꽤 강하게 느껴지는 건물이었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보면 정통적인 유럽풍 건물이라기보다는 중국풍도 다분하게 가미된 그런 느낌 역시 들기도 했다. 글 초반부에서 언급한 Wan Chai 우체국처럼 유럽풍이긴 하지만 묘하게 중국풍이 혼합되어 있는 또 다른 홍콩 스타일 건물이었던 셈이다.
이 건물은 과거 한때는 아래 60년대나 2003년 사진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총 4개의 주소로 나누어져 각 주소지마다 잡화점, 미용실, 옷가게, 심지어 종친회 등 다양한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홍콩 정부 주관하 개보수 공사가 착수되었고 다음 해인 2008년 4개 주소가 모두 합쳐진 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한편 원래 이 건물에 있었던 '和昌(Woo Cheong)'이라는 전당포는 사라졌지만, 의외로 홍콩의 거리에서는 요즘에도곳곳에서 전당포를 흔하게 볼 수 있어서 나름 꽤 의외였다. 과거 한때 서울에도 매우 흔했던 것이 전당포였지만 이제는 좀처럼 보기 어렵게 된 것과는 꽤많이 다른 현상이었고, 또 국제 '금융' 도시라는 홍콩의 이미지와도 어울리지가 않는 그런 모습이었는데, 홍콩 경우 은행권의 대출 절차가 워낙 까다로워 은행에서는대출받기가 꽤 어려운 것이 전당포가 아직도 그렇게 많이 남아있는 이유라 한다.
서울에서도 이제는 좀처럼 보기가 어렵게 된 고전적인 금융 기관 전당포가, 국제 금융도시 홍콩에서는 여전히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는 현상은꽤나 아이러니한 것 같다.
8) Murray House (1844년)
홍콩섬 남부에는 Stanley라는 이름을 가진 지역이 있었다. 이곳은 홍콩섬에서도 가장 남쪽에 있는 지역이었는데 남쪽 바다를 마주하고 있어 그런지 유독 햇살이 따갑게 느껴지는 그런 지역이었다.
이곳은 다양한 유럽풍의 식당들이 많이 밀집된 곳이었고 또 Stanley Market이라는 이국적인 분위기의 전통시장 역시 있었으며, 실제로 유럽인들이 꽤 많이 거주하거나 찾아오는 지역이었다. 나 역시도 주말에는 이곳의 이국적인 분위기도 즐기고 또 솜씨 좋은 이태리 식당에서 식사도 할 겸 이따금 찾아가곤했던 곳이었다.
이곳에는 'Blake(Stanley) Pier'라는 선착장도 있었는데, 홍콩섬 남쪽에 있는 작은 섬이나 무인도를 왕래하는 배들이 바로 이 선착장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그런 섬으로 여행 갈 때는 역시 이곳으로 와서 이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가기도 했었다.
사진) Blake Pier 모습 (2013 여름 경)
이곳에 유럽풍 레스토랑이나 유럽인들이 많은 이유는 과거 1842년 홍콩이 영국 식민지가 된 직후에 영국의 초기 홍콩 정부가 한동안 이곳에 있었고, 그 이전에도 1841년부터는 영국군이 주둔하는 Stanley Fort라는 군사 기지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Stanley Fort는 2차 대전 당시에는 영국군이 일본군에게 항복하기 전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곳이기도 한데,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이 된 이후에는 이제 이 기지는 중국의 군사 기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청나라에서 영국으로, 영국에서 일본으로, 일본에서 영국으로 그리고는 영국에서 중국으로 다시 그 주권이 넘어간 홍콩의 역사가 이 Stanley Fort라는 군사 기지 주둔군의 역사에 그대로 새겨져 있었던셈이다
이곳에는 또 무려 177년 전인 1844년에 완공된 Murray House라는 매우 오래된 건축물도 있었다. 하지만 의외로 현재 Stanley에 있는 이 건축물은 원래는 홍콩섬 반대편에있는 Central이라는 지역에 있었고, 그곳에서 영국군 장교 숙소로, 또한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했던 2차 대전기간에는 일본군의 사령부로 사용되다가, 일본군이 물러간 이후에는 홍콩 정부 관공서 사무실로 사용되기도 했다고 하다.
하지만 이 건물이 있던 자리에 Bank of China 건물이 새로 건축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게 되면서 1982년 이 건물은 해체되었다. 그리고 조각조각 해체된 건물 잔해는 20여 년 가량 보관되어 있다가 2001년 다시 건물로 조립되었는데, 조립된 위치가 바로 현재의 Stanley 지역이었던 것이다.
사진) Murray House 모습. 사진 좌측에 Blake Pier 역시 보인다. (2014. 5월)
Stanley로 이전된 이후 이 건물은 현재 다양한 레스토랑과 상점이 가득한 쇼핑몰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Stanley Fort에서 본 Murray House (2014. 5월)
한편 좀 이외의 사실인데, 이 건물이 이곳으로 이전되기 전 Central 지역에 있던 시절에는 이 건물에 악령이 있다 해서 악령을 쫓아내는 '퇴마 의식'이 거행된 적이 있다고도 한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1963과 1974년 무려 두 번씩이나 거행되었다 하는데, 당시는 영국의 홍콩 정부가 이 건물을 사용하고 있었던 바 당연히 홍콩 정부 승인하에 퇴마의식이 진행되었을 것이다.
홍콩 포함 중국의 남부 지역이 유독 민간 신앙이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지역인 데다가, 유럽의 퇴마 문화까지 결합되어 영국 정부 승인하에 정부 청사에서 귀신을 쫓는 행사까지도 거행되었던 셈이다. 서울 정부 청사에서 퇴마 의식을 하는 것과 같은 황당한 일이 홍콩에서는 실제로 있었던 것인데, 그만큼 홍콩에서는 민간 신앙이 뿌리가 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 건물에 귀신들이 유독 많았던 이유는 제2차 대전 기간에 일본군이 이 건물을 헌병대 본부로 사용할 때 무려 4천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이 건물 안에서 잔혹한 고문을 받고 결국 잔인하게 처형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 원귀들이 건물 안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다는 얘기인데, 일본군의 잔인함을 이런 역사에서도 다시 한번 새삼 느낄 수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좀 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비록 홍콩에서는 일본의 피해자였던 영국이지만 영국도 역시 체포된 식민지 포로들을 산 채로 불에 태우는 등 과거 자신들이 지배하고 있던 식민지에서 저지른 만행을 보면 영국은 일본과는 전혀 다르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