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is의 Eurocentre라는 어학원에는 전 세계에서 불어를 배우러 온 다양한 학생들이 있었다. 대부분 20~30대 나이 학생들이었는데, 간혹 10대 학생이나 40대가 넘는 학생도 있었다.
그런데 남학생들 사이에서, 특히 스위스 출신 학생들 경우 학원의 일본 여학생들을 Taxi라고 부르는 경우가 꽤 자주 있었고 또 일본 여학생과의 연애 경험을 가까운 친구들에게 얘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것이 Taxi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스위스 학생들이 왜 이 단어를 일본 여학생들에게 적용했었는지 그 의미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Paris에서 내가 듣거나 또 직접 목격한 바로는, 한국인 여학생 포함 다른 나라에서 온 여학생들도 성적으로 자유분방한 정도에 있어서는 결코 일본 여학생들에 뒤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대다수의 남학생들 또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원래 고국에서도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Paris에서는 많은 남녀 학생들이 그러했는데, 그중에는 솔직히 기혼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유독 일본 여학생에게만 그런 Taxi라는 특이한 단어가 적용된 이유는 아마 일본인 여학생들의 수가 상대적으로 많아 눈에 띄는 집단이 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사실 고국에서는 기혼자였든 미혼자였든 Paris라는 이방 땅에서는 당시 그 학원에 다니던 남자나 여자는 모두 같은 처지로, 객지에서의 쓸쓸하고 외로운 이방인의 삶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워낙 사랑과 낭만이 가득한 도시가 또 Paris이다 보니, 그 고독과 외로움을 홀로 견디지 못하고 미지의 이성을 찾아가 만나면서 달래가게 되는 것 같았다. 때로는 불륜이라는 낙인이 찍히는 오명을 감수해 가면서도 말이다....
Paris에서 유학생 친구를 통해 몇 다리 건너 알게 된 A라는 한국인 남자가 있었다. 나 보다는 3~4살 정도 나이가 젊은 유부남이었는데, Paris에서 혼자 생활한지는 이미 4~5년 정도 됐고, 한국에서 어린 자녀들과 함께 살고 있는 부인이 1년에 한두 번 잠시 남편을 만나러 Paris로 오곤 했었다.
한편 적지 않은 나이에 혼자 사는 사람들끼리라 서로 뭔가 통했는지,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음에도 나와 그 A와는 유난히 친해져서 단둘이 술자리도 자주 하고 또 허물없는 얘기까지 하는 사이가 되었다. 난 미혼이었고 그는 유부남 신분이었지만 어쨌든 Paris에서는 집에 들어가면 가족의 온기란 전혀 느낄 수 없는 외로운 처지라는 공통점이 서로 통했던 것 같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날도 객지에서의 외로움도 달랠 겸 둘이 거나하게 한잔하고 있는데, A가 갑자기 얼마 전부터 불어 학원에서 만난 일본 여인과 동거 생활을 하고 있다고 불쑥 실토했다.
동거하는 장소도 다른 곳도 아니라 자신의 부인이 한국에서 오면 함께 머무는 아파트, 즉 A가 평소에 거주하는 바로 그 아파트라고 했다. 부인이 Paris에 오겠다는 소식을 접하면, 평소 그곳에 살던 일본 여인은 철저히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잠시 다른 곳으로 피신해 있기 때문에부인은 아직 전혀 모른다는 것이었다.
유독 그 일본 여성이 성적으로 더 자유분방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A와 동거하는 일본인 여성은 20대 초반의 미혼녀로 분명히 A가 30대 초반 나이의 유부남이란 것도 알고 있었고, 부인이 가끔 Paris로 찾아오는 것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것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그저 A와의 사랑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윤리적인 문제 등을 논외로 할 수만 있다면, Paris에 사는 그 기간만큼은 오로지 자신들의 감정과 사랑에 최대한 충실하겠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옆에서 내가 보기에도 그 당시의 그 두 사람은 정말 보기가 드물 정도로 감정적으로는 너무도 사랑하는 사이로 보였다. 물론 두 사람 간 금전 거래는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난감한 문제가 터졌다. 일본에 계신 부모님께 잠시 갔던 일본인 동거녀가 Paris로 돌아오는 날 A가 차를 가지고 공항에 마중 나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녀보다 며칠 뒤 도착 예정이던 부인 도착 일정이 갑자기 변경되어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같은 날 Paris에 도착하게 되는 돌발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그런데 더 황당한 것은, 두 사람이 같은 날 도착할 뿐 아니라 항공편까지 같은 항공편으로 도착한다는 것이었다. 정확히 누가 환승하는 항공기를 탑승했는지이제 기억이 명확하지 않지만,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일본이나 한국에서 항공기를 갈아타는 일정으로 오는 바람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었다. 당시 그렇게 환승을 해서 Paris로 오면 항공료를 절감할 수 있었다.
한편 A 부인이 자신과 같은 항공편으로 도착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일본인 동거녀는 공항에 도착하면 곧바로 마중 나오기로 한 A를 찾을 것인데, 이미 출발해서 항공기 안에 탑승해 있으니 공항에서는절대로 자신을 아는 척하지 말아 달라고 미리 연락을 취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부인이 오랜만에 Paris에 온다는데 A가 공항에 나가지도 않을 수는 없었다.
결국 고민을 거듭하던 A는 그 일본인 동거녀의 얼굴을 알고 있는 내게 협조를 요청해 왔는데, 그의 계획은 자신은 일단 공항 구석에 숨어 있고, 부인과 동거녀가 공항 입국장으로 들어오면 내가 나가서 동거녀에게 상황을 설명한 후 그녀를 다른 곳으로 데리고 가고, 동거녀가 사라지고 나면 그다음 A가 모습을 나타내고 부인을 맞이하여 함께 아파트로 가는 그런 것이었다. 그의 부인은 나를 본 적이 없어서 내 얼굴을 전혀 모르니 정말 만에 하나 두 여인이 동시에 입국장으로 들어오더라도 아무런 문제 될 것이 없었다.
부인 그리고 동거녀까지 두 여인이 함께 탑승했던 항공기는 마침내 도착했고, 다른 승객들과 함께 두 여인도 예정대로 나왔는데 다행히 일본 여인이 더 먼저 나와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상황을 설명한 후에 다른 곳으로 그녀를 데리고 갔다. 그 뒤 A의 부인이 나왔고 A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부인과 함께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
어쩌다 일이 꼬여서 두 여인이 나란히 입국장으로 들어와서 동시에 A에게 접근해왔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 발생할 수도 있었는데, A의 철저한 계획과 나의 도움(불륜의 공범 같은 느낌이 들어 도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하는 것도 사실 부담이 된다)으로 그런 일은 발생하지 않았고, 아무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그 부인은 지금도 그날 자신이 남편의 동거녀와 함께 같은 항공기를 10시간 이상 타고 왔다는 사실은 전혀 모를 것이다.
한편 이 사건을 통해A는 뭔가 큰 깨우침을 얻었는지 이후 그의 외도는 오래가지 않고 중단됐는데, 몇 년이 지난 뒤에 한국으로 완전히 귀국해서 부인과 함께 한국에서 잘 살고 있다. 얼마 전 서울에서 오랜만에 만나 한잔하기도 했는데, 그 이후 철저히 반성을 했는지 부인에 대한 애정도 전과는 달리 진심으로 너무도 각별한 것으로 느껴졌다.
물론 과거 그의 Paris에서의 외도는 그날 굳이 다시 화제로 꺼낼 필요가 없을 것 같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 역시도 그 일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언급도 없었다. 현재의 결과만을 놓고 본다면, 세상에는 때론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오히려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이것은 내 짧은 생각일 뿐이다. 반대로 잘못은 철저히 정죄하고 끝까지 책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그것 또한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사랑으로 맺은 관계일 뿐 아니라, 부부관계라는 일종의 계약 관계에 있는 사람이 상대방에게 속는 것은 정말 치 떨리는 배신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역시 Paris에서 알게 된 B라는 또 다른 한국인 지인인데, B 역시 가족은 한국에 있고 Paris에는 혼자 와 있었다. 한국에 어린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가끔 저녁에 B 집에 가서 와인 한잔 할 때, 어느 정도 와인이 들어가면 B는 거의 항상 아들 보고 싶다고 울곤 했다.
우는 것도 눈물이 글썽한 정도가 아니라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수준이었는데, 그러다 감정이 더 격해지면 참지 못하고 아들 목소리 들어야겠다고 당시 그 비싼 국제 전화를 여러 번 하기도 했었다.
술에 약한 건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여리고 약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나보다 2살 정도 젊었으니 당시 그 역시 이미 30대 초반인데 그런 성인 남자가 그렇게 자주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사실 좀 곤혹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사람은 좋아 자주 만나곤 했었다.
그런데 하루는 전혀 다른 이유로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날 역시 13구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함께 한잔하고 있었는데, 취기가 좀 오르자 그가 갑자기 눈물을 글썽이기 시작하더니 이번에는 아들이 아니라 며칠 전 만난 한국인 여대생이 너무 그립다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Paris에 혼자 여행 왔던 한국인 여대생을 식당에서 우연히 만나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어떻게 하다 보니 그녀를 처음 만난 바로 그날 그의아파트로까지 와서 함께 와인 한잔하는 것으로 이어졌으며결국에는 더 나아가 그 집의 빈 방 하나를 그날 하루 밤 그녀의 숙소로 제공하는 것으로까지 대화가 진전되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그의 나이가 33살 정도였으니 휴학하고 프랑스 여행 다닌다는 그 여대생과의 나이 차는 많아도 약 10년 정도로 적지는 않았지만 또 그렇게 심하게 많은 차이도 아니었는데 그처럼 젊은 남녀가 같은 아파트에서 그것도 사랑과 낭만이 넘치는 Paris에서 온 밤을 지내게 되었으니 성관계로까지 연결되었다 한다.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것 같은 얘기지만, 초면의 남녀가 만난 지 24시간도 안돼 성관계까지 갖게 된 그런 일이 실제발생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행복하기만 했던 밤을 보내고 아침에 깨어나 보니, 그녀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 아파트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말 밤새 꿈을 꾼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녀 흔적은 너무도 철저히 사라졌다는데, 자세히 보니 응접실 테이블 한 구석에 쪽지 같은 것이 있어서 열어 읽어보니 그녀가 남긴 쪽지였고, 그 내용은 어제는 참 즐거웠고 감사했지만, 이제 영원히 나를 찾지 말라는 그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한다.
실명이 아닐지도 모르는 이름만 알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24시간도 안돼 헤어졌으니 B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했고, 당연히 연락처나 연락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보고 싶은 마음을 울음으로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답답한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 여대생은 그 이후 단 한 번도 그에게 다시 연락을 해 온 적이 없었다 한다. 정말 그날 딱 하루 인생을 철저히 즐기고 영원히 떠나버린 셈인데, 그녀와 고작 하루만을 보낸 B는 그 이후에도 오랜 기간 그녀를 잊지 못하고 때로는 눈물을 흘리던 모습을 기억해 보면, 어쩌면 사랑에는 여성이 훨씬 더 매정하고 냉정한 반면, 여성보다는 좀 더 강해 보이기도 하는 남성은 의외로 더 약하고, 더 상처 받고, 더 아파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 같다.
1995년 그 시절이나 또 어쩌면 현시점에서도 역시, 내가 다녔던 학원 학생들 사이에서도, Paris 지인들 사이에서도, 그리고 또 미지의 수많은 Paris 사람들 사이에서도, 때로는 단순한 욕정인지 조차 모를 사랑까지 포함해서 정말 수많은 사랑이 Paris 곳곳 여기저기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랑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다양하고 깊은 사연이 있었을 만큼 타인이 그런 사랑들의 본질을 판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Paris 같은 아름답고 낭만적인 객지 도시에서 외롭게 홀로 살게 되면, 인간이란 남녀 모두 결국 연약하고, 외롭고, 의지하고 싶고 또 너무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좀 더 적나라하게 깨우치게 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