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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T Jul 10. 2022

이촌동 연가 (20)

■ 이촌동의 북쪽 경계, 그 철길

2022년 현재 이촌동에는 경의 중앙선과 4호선이 지나가는 이촌역이 있다. 그중 과거 경원선이라 불렸던 경의 중앙선 이촌역이 1978년 말 먼저 개통되었고, 이어서 4호선 이촌역이 7년 뒤 1985년 개통되었다.


따라서 1978년 이전에는 이촌동에 전철역이라고는 전혀 없었다는 의미인데, 아래 사진이 바로 이촌역이 없던 시절의 이촌역 부근 사진이다. 사진 속 공무원 아파트 24동이 우리 가족이 살던 아파트로 그 우측이 현재 이촌역 4번 출구가 위치해 있는 곳이다. 50여 년 전의 오랜 기억이 맞다면 말이다....


사진) 이촌역이 생기기 이전 이촌역 4번 출구 부근 70년대 초반 모습


사진) 2021~2년 이촌역 4번 출구 모습. 70년대 초반 찍은 사진 속 모습과는 너무도 달라 동일한 장소가 아닌 것 같다.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는 한국 외대를 다녔던 나는 정말 운 좋게 대학에 입학하기 바로 직전에 이 이촌역이 생기고 경원선이 개통된 덕분에 집이 있는 이촌동에서 외대가 있는 휘경동 사이를 교통체증 전혀 걱정할 필요 없이 단 한 번 전철을 타고 빠르게 등하교할 수 있는 행운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시절 이촌동 대표 버스인 38번 진아교통 버스가 이촌동과 월계동 사이를 운행하면서 외대 앞을 지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이 버스를 타면 교통 체증이 극심한 서울역, 시청, 종로 등 시내 중심을 돌고 돌아서 적어도 2~3시간 정도는 버스 안에서 매일 소모해야 등하교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때마침 경원선이 개통되어 거의 직선거리로 이동하게 되면서 30분 내 도착하는 엄청난 혜택을 봤던 셈이다.


(추억의 38번 진아교통 버스)

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busmuseum&logNo=221110291269


게다가 요즘에는 외대역 바로 직전 회기역에서 전철을 갈아타야만 외대역에 도착하지만 80년대 내가 외대 다니던 시절에는 이촌에서 외대까지 직통이어서 갈아타야 할 필요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직전 역인 회기역에서 갈아타야만 하는 것으로 노선이 바뀌어 있던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바뀌었는지 모르겠다.


사진) 80년대 이촌동에서 경원선 타고 외대 다니던 시절의 모습. 이제 할배가 된 노인도 이런 20대 시절이 있었다.


한편 70년대 초중반까지 이촌동에 전철역은 존재하지 않았지 현재 경의 중앙선 전철이 다니는 철길은  시절에도 이미 존재했었다. 다만, 당시는 그 철길 위로 지하철이나 전철이 아닌 용산에서 출발하는 일반 기차가 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기나긴 철길로 이촌동이 이웃 동네 용산동과 분리되어 있다 보니 남쪽으로는 폭이 약 1km 달하는 거대한 한강으로, 또 북쪽으로는 이 철길에 의해 이촌동은 외부와 단절된 일종의 섬과 같은 동네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주변과 단절되어 있다 보니 철길 건너 용산동에 거주하는 친구를 만나거나 그쪽에 갈 일이 있으면 철길의 건널목을 건너가야만 했는데 그때 사용할 수 있었던 유일한 건널목이 바로 아래 사진에 보이는 건널목이었다.  


이 건널목은 2022년 현재도 여전히 존재하는 지상 건널목이다. 하지만 요즘은 4호선 전철역 지하도를 통해 용산동으로 걸어갈 수 있는 반면, 이촌역 지하도가 던 그 시절에는 이 건널목이 이촌동에서 용산동으로 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유일한 관문이었다.


사진) 이촌동과 용산동을 연결하는 건널목 (2022. 1월)


사진) 같은 건널목을 길 건너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 (2021. 6월)


형태는 다소 바뀌었지만 사진에 보이는 저 건널목 사무실은 70년대에도 같은 장소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발생한 한 사건으로 이 사무실은 한동안 내게는 매우 끔찍한 악몽과 같은 존재로 남아있었다.


루는 용산동 친구 집에 가기 위해 이 철길을 건너갔는데, 올바른 행동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흔히 그랬듯이 그날도 정식 건널목이 아닌 일반 철 길 위를 건너서 넘어갔다. 그런데 마침 철길 상태를 점검하던 건널목 직원에게 그 장면이 적발되었고 그 직원은 나를 사진에 보이는 저 사무실까지 끌고 갔다.  


그리고는 그 사무실 안에서 내 이름과 학교, 주소 등을 묻고 기록하더니 내가 무단으로 철길을 횡단했으니 이제 곧 감옥에 가게 될 것이라고 을 했던 것이다.


그런데 당시 초등학교 3, 4학년밖에 안될 정도로 어렸던 나는 그 직원의 그대로 받아들였정말 감옥에 가야만 하는 것으로 굳게 믿게 되었다. 요즘이야 초등학교 3학년도 그 허풍에 좀처럼 넘어가지 않겠지만 70년대 인터넷은 물론 TV조차 흔하지 않던 그 시절을 살던 당시의 아이들은 지금보다는 훨씬 순진했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나만 유난히 어리숙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당시 나는 그의 황당한 엄포대로 10살 나이에 감옥을 가야 한다고 믿게 되었고 한동안 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후 실제로는 당연히 감옥에 가지 않았아무런 일도 없었지만, 당시 몇 시간 동안 뼈저리게 느껴야 했던 공포는 지금도 기억이 난다. 얼마나 충격이 컸으면 불과 10살 정도 나이에 겪었던 이 일을 5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하겠는가?


그 직원은 물론 무단 횡단 재발을 막기 위해서 그런 말을 했겠지만, 사실 생각해보면 10살밖에 안된 어린아이에게 감옥 간다고 겁박했던 것은 지나친 언행 아니었나 싶다.


사진) 초등학생 3~4학년 즈음의 내 모습. 이런 어린아이에게 감옥 간다고 겁박을 했으니....


한편 이 이촌동의 북쪽 경계인 이 철길은 그 시절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이촌동 아이들'과 '용산동 아이들'을 구분하는 하나의 기준선 같은 선이었던 것이다.


물론 현재는 2005~6년 경 진행된 대대적인 재개발로 인해 용산동도 아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초고층 아파트 단지로 대부분 지역 모습이 변해버렸다. 하지만 70년대에 용산동은 단층 집들이 가득 들어선 동네였고 그런 면에서 아파트만이 존재했던 철길 건너 이촌동과는 그 분위기가 너무나도 다른 동네였다.   


주택도 없는 허허벌판이었던 이촌동에는 1960년대 말부터 아파트가 들어섰다면, 기존에 이미 개인 주택이 가득했던 용산동 그로부터 약 30여 년이라는 긴 시간이 더 흐른 후에야 복잡한 재개발을 통해 아파트가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사진) 2005~6년 재개발 이후 들어선 이촌동 철길 건너의 용산동 초고층 아파트 모습 (2020. 3월)


사진) 용산동 재개발 직전 2004. 5월에 찍은 이촌역 1번 출구 근처 어느 골목길 모습. 이 골목길도 재개발 당시 사라졌지만 과거에는 이런 골목길과 단층 주택이 용산동에는 가득했었다.


사진) 용산동 재개발 이후에도 아직 여전히 남아 있는 용산세무서 주변 일부 오래된 주택들 모습. 이 주택들마저 머지않아 재개발로 사라질 것이다. (2020. 3월)


그런데 이처럼 용산동과 이촌동 분위기가 크게 다르고, 또 모두가 그랬던 것은 결코 아니었지만 아파트촌인 이촌동에 사는 아이들이 단독 주택으로만 구성된 용산동에 사는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유한 가정에 사는 경우가 많다 보니, 이촌동 아이들과 용산동 아이들 사이에는 때로는 보이지 않는 벽과 같은 것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 보이지 않는 벽을 표현하는 단어가 바로  '철길'이었던 것이다.  


 이촌동 안에 있는 신용산 초등학교에서 학생들 간에  거주하는 동네를 물어볼 때는 "용산동 산다" 이렇게 답하기보다는 "철길 건너 산다"라고 답하곤 했던 것이다. 어린아이들의 유치하고 부질없는 구분이었지만 그래도 그 시절 이러한 구분으로 인해 나름 상처를 받는 친구들도 꽤 있었는데, 심지어 요즘도 동창회를 하면 그때 철길 기준 어디 살았냐고 물어보는 동창도 있을 정도다.


어쨌든 70년대로부터 50여 년의 세월이 더 흐른 요즘은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말에 걸맞게 두 지역 모두 아파트촌으로 변해버렸으니 이제는 신용산초등학교 아이들 사이에서도 더 이상 그런 구분은 없을 것 같다....


아울러, 이 철길의 지하화도 몇 년 전부터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으니 이촌동의 한쪽 끝을 오랜 기간 상징해 왔던 이 철길이라는 확연한 구분선도 언젠가는 땅속으로 묻혀 희미한 이촌동 역사의 기억 속으로 사라져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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