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나?
사람들은 왜 살려고 할까요? 세상에 태어났으니까,아니면 죽으면 아플까 봐 그런 것일까? 우린 누구나 얼떨결에 자신도 모르게 죽겠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면서도 매일매일 하루를 살아간다. 더구나 한번 태어난 인생,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진 인생을 살아갈까? 고민하기도 한다. 그건 우리의 자연스러운 본능이 아닐까? 어린아이가 엄마를 찾듯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예로부터 좀 더 오래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자 집을 짓기도 하고,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다. 어디 이뿐인가? 고대 이집트에서는 죽은 사람을 방부제로 미라를 만들기도 했고, 죽은 자와 함께 그가 사용하던 옷이며 그릇이며 다양한 물품들을 함께 묻기도 했다. 육신의 생명은 끝이 났지만, "영혼은 죽지 않을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렇듯 최고의 과학이 함께하는 오늘날까지도 죽음을 벗어나고 싶은 이 명제는 시대를 막론하고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고등한 생명체인 인간에겐 죽음이란 어쩌면 맞지 않는 옷처럼 너무나도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좀 더 건강하고 오래 살기 위해 운동하는가 하면, 주말이면 자전거 타기와 맑은 공기를 찾아 산행하기도 한다. 이만 아니다. 온 집안엔 이름 모를 건강식품을 쌓아놓고 먹기도 하고, 몸에 좋다는 건강 정보를 얻기 위해 TV에서 건강 관련 프로그램을 찾아 나서기도 한다.
오죽하면 세상의 3대 거짓말 중 하나로 노인들이 "이제 죽으면 좋겠다"는 말이 생겼을까 말이다. 이처럼 살아생전의 처절한 몸부림도 모자라서 죽고 나서도 죽음을 쉽게 잊지 못한다.
우리가 이따금 장례식장에 가게 되면 참석한 모두는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진다. 망자의 모습이 다가올 자기 모습으로 투영되었기 때문인가? 모두는 마치 죽은 고인이 된 것처럼 우리 인생의 허망함을 느끼며 안타까워한다. 우리 모두의 안타까운 모습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아마도 이러한 장례식의 슬픈 모습은 그 어떤 동물에서도 결코 볼 수 없는 특별한 모습이다.
(성경 전도서 3:11"그분은 모든 것을 제때 아름답게 만드셨다. 또 그들의 마음에 영원이라는 개념을 넣어 두셨다. 하지만 인간은 결코 참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찾아내지는 못한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후손들은 돌아가신 아버지 할아버지는 물론 얼굴도 모르는 조상의 죽음을 기념하며 일 년에 몇 차례씩 새벽잠을 설쳐가며 제사를 지낸다. 혹시 죽은 조상이 자신들을 해치지 않을까 염려하기도 하고, 또한 자신들의 평안을 지켜주길 간절히 바라면서 말이다.
(성경 전도서 9:5 "살아 있는 자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지만,*+ 죽은 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다시는 상*도 받지 못한다. 그들에 대한 기억이 모두 잊혔기 때문이다."+)
이처럼 죽음과 삶에 대한 추구의 자연스러움은 20대 청춘남녀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들에겐 어쩌면 남은 인생이 50~60년밖에 되지 않음에도 서로 간에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절대 변치 말자고 하며 반지를 교환한다. 자신도 모르게 이러한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은 우리의 정신과 마음속에 이미 영원한 삶에 대해 간절함이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첫 조상이 죄의 길로 들어서지만 않았더라면 이러한 영원한 생명의 삶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현실로 이뤄졌겠다고 생각해 본다.
(성경 로마 5:12 "그러므로 한 사람을 통해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를 통해 죽음이 들어왔으며,+ 이처럼 모두가 죄를 지었으므로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퍼졌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바쁘게 살아간다. 진지한 고민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채 파도에 휩쓸리듯 세상에 자신을 내맡긴 채 하루를 바쁘게 지낸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며 자신도 모른 게 잠이 든다.
오늘 아침에도 식사를 거른 채 하루를 시작한다. 가끔은 멈추어 생각해 보자.
나는 어디로 가고 있나?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