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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절하면서도 외로운 소나무

[옛 그림 속 나무 이야기]

by 데일리아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이번 작품은 <세한도(歲寒圖)>(1844, 국보)입니다. 세로 24센티미터, 가로 108센티미터의 족자 형식으로 된 그림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무가지보(無價之寶)'라고 할 만큼 추사 김정희의 대표작으로 꼽습니다. 가로로 긴 화면에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과 좌우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대칭되게 그렸고 나머지 화면은 텅 비어있어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가 뼛속까지 전해지는 듯합니다.


‘세한도’란 이름은 논어 자한편의 겨울이 되어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뜻의 '세한송백(歲寒松柏)'에서 왔습니다. 노송의 가지가 떠받치고 있는 오른쪽 위에는 '세한도'란 화제(畫題)와 '우선시상(藕船是賞, 우선 이상적에게 이것을 줌) 완당(阮堂, 추사 김정희의 또 다른 호)'이라고 새긴 낙관이 찍혀 있습니다. 그 빨간 도장이 없었다면, 마치 방점을 안 찍은 듯, 그림이 허전했을 법합니다. 우선은 이상적의 호입니다. 또한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장무상망(長毋相忘)' 인장을 더했으니 사제의 애틋한 정이 그림의 가치만큼 감동적입니다.

1383_2957_727.jpg 김정희, 세한도, 1844. 두루마리, 종이에 먹, 23.9×108.2cm. 국립중앙박물관.

이 그림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도에 유배 당해 살던 때(1844, 59세) 당시 역관으로 있던 제자 우선 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인품을 아끼는 마음에서 그를 위해서 그린 그림입니다. 이상적은 역관으로 있으면서 중국을 다녀올 때 스승인 추사에게 드릴 책을 구해서 어려움을 무릅쓰고 선물해 주었던 것인데요. 당시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이었던 김정희에게 귀한 책을 보낸다는 것은 어지간한 각오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상적은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로지 스승에 대한 의리만을 생각하여 두 번이나 책을 보냈다고 합니다.

1383_2980_1636.png 세한도는 청나라 문인 16명과 우리나라 문인 6명의 감상 글이 쓰여져 있다.

추사 김정희는 그런 제자의 마음 씀씀이가 너무도 고마웠을 것입니다. 제주도에 유배된 지 5년째 되던 해였습니다. 이 그림은 이상적의 인품을 한겨울에도 잎이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에 비유해 칭찬하고, 자신의 마음을 담은 글을 추사체로 써서 그림 끝에 붙였습니다. 소나무는 책을 구해 준 이상적의 지조를 뜻하고 잣나무는 금번에 또다시 책을 구해 준 절개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이상적은 이듬해 북경으로 이 그림을 가져가서 저명한 인사 16인의 찬시를 받아 그림 끝에 붙였고 이후 일제 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을 서예가 소전 손재형이 거액을 들여 사들였는데, 이에 대해 오세창, 정인보 등의 글이 덧붙여져 장장 14미터의 긴 그림이 되었습니다.

1383_2981_1938.png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는 의미의 '長毋相忘(장무상망)' 인장


1383_2982_2328.png 건물 앞 오른쪽 노거수(老巨樹)는 소나무


그림 속에는 네 그루의 나무가 보이는데요. 건물 앞 오른쪽 노거수(老巨樹)는 소나무, 나머지 세 그루는 잣나무라고 흔히 얘기합니다. 하지만 ‘송(松)’이 소나무인 것은 틀림없으나 ‘백(柏)’이 무슨 나무인지는 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백(柏)이라고 하면 측백나무와 잣나무를 함께 가리킵니다. 괴(槐)라고 하면 느티나무와 회화나무를 함께 이르는 것처럼요. 흥미로운 것은 제주도에는 아예 잣나무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세한송백’의 나무는 소나무와 측백나무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세한도>에 그려진 나무가 소나무와 측백나무일까요? 문인화로서 마음속의 풍광을 그렸을 터이지만 그림의 모델은 있었을 것입니다. 추사가 귀양 가서 살았던 제주 서귀포 대정마을에서 만나는 익숙한 나무를 대상으로 삼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대정 일대에는 침엽수로서는 소나무와 바닷가에서 주로 자라는 곰솔(海松)이 흔한 곳입니다. 그림에서 보면 집 앞의 비스듬히 자라는 오른쪽 노거수는 줄기의 중간이 비어 있고 껍질이 거북등처럼 갈라지는 모습으로 보아 소나무의 전형적인 특징이 보입니다. 바로 옆 나무는 굵기가 소나무보다 작으며 껍질이 세로로 길게 갈라져 있고 줄기도 곧습니다. 잎은 촘촘하고 솔잎도 억세 보입니다. 곰솔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집 왼쪽의 두 나무는 오른쪽 나무보다도 지름이 가는 젊은 나무인데요. 줄기가 곧으며, 가지는 거의 수평으로 뻗고 잎은 상하 짧은 직선으로 곰솔의 특징과 일치합니다. 따라서 <세한도> 속에서 만나는 나무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와 세 그루의 곰솔입니다. 결국 ‘세한송백’의 교과서적인 뜻은 소나무와 측백나무, 그림 속의 실제 나무는 소나무와 곰솔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차분히 그림을 감상해 봅니다. 흐릿한 한 채의 집과 노거수가 풍기는 스산한 분위기가 추운 겨울의 분위기를 그대로 전달해 주는 느낌입니다. 묵의 농담만으로도 지조 높은 작가의 내면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려진 것만 보고 그림을 평가할 수 없듯이 그려지지 않은 여백의 미, 그 처절하도록 쓸쓸한 외로움이 <세한도>의 백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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