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함께 사는 법

by 꿈의복지사

울릉도의 하루는 바람으로 시작된다.
아침 햇살보다 먼저 창문을 흔드는 바람 소리에 눈을 뜨고, 따뜻한 물이 콸콸 나오는지 확인하는 일로 하루가 열린다.

“오늘은 물이 괜찮군.”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세숫대야에 얼굴을 담근다.

수압이 세면 마음이 놓이고, 약한 날은 괜히 하루가 불안해진다.

작고 반복되는 습관이 하루를 지탱해 주는 울릉도의 생활 리듬이다.

방 창문을 열면 멀리 도동항이 내려다보인다.

등굣길인지 산책길인지 모를 누군가의 발걸음이 실루엣처럼 스쳐 지나간다.

도시의 풍경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바람과 파도가 섞인 소리가 그 길을 감싸고 있다.

라디오는 어젯밤 꺼둔 채 그대로다.

라디오를 다시 켜는 순간, 느림의 리듬, 사람의 목소리, 음악 사이사이 흘러나오는 생활 정보까지—

이제는 내 하루의 배경이자 정서가 되었다.

빛보다 소리로 하루를 여는 일이 이젠 낯설지 않다.

TV는 이 섬에 들어온 이후 멀어진 존재다.

자극적인 화면 대신 말의 온도를 느끼는 아침이 더 익숙해졌다.
소리의 느림은 이 섬의 시간과 묘하게 닮아있다.

간단히 아침을 차려 먹고 나면, 동네 마실을 나가듯 이웃 가게에 들러 인사를 건넨다.

“오늘도 바람이 심하네요.”

“비 온다더니 그냥 바람만 불고 있어요.”

울릉도에서 날씨는 대화의 시작이자 삶의 변수다.

섬에선 날씨가 곧 생활의 조건이 된다.

하루하루의 일정을 결정짓는 것은 배 시간도, 출근 시간도 아닌 '바람'과 '파고'와 '강수량'이다.

밤새 천둥이 으르렁거리고, 창을 두드리는 비바람 소리에 불안한 잠을 뒤척이다가 새벽에 일어나면 전자시계는 깜빡이며 12:00을 가리킨다.
정전이다. 예전 같았으면 촛불을 찾았을 터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휴대폰 라이트를 켠다.
작고도 묵직한 불빛 하나가 정전의 불편을 조금 덜어준다.
섬의 삶은 철저히 자연과의 공존 속에서 이루어진다.
계획은 종종 미뤄지고, 약속은 바람 앞에서 무력해지기도 한다.

그런 날엔 창밖을 내다본다.

이웃들도 마당에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누군가와 한마디 나눈다.
불편함을 함께 겪는 이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묘한 위로가 된다.

어느 날은 후배가 육지 병원에 가게 되어
그가 맡고 있던 우체국 업무를 대신하게 되었다.
생전 처음 접수창구에 서서 택배를 받아보는 경험이었다.
더덕, 부지깽이, 건오징어 같은 특산물을 보내는 주민들의 손길은 바쁘고 분주하다.

그날은 기상악화로 배송이 밀려 택배 물량이 쏟아지는 날이었다.
‘오늘 나가지 않으면 며칠 더 묶인다’는 절박함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하지만 주민들은 다 안다는 듯 말없이 기다린다.
속도보다는 신뢰와 인내가 이 섬을 지탱하는 힘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다.

오후 바람이 잦아들면, 마을 사람들이 슬슬 바깥으로 나온다.
“점심 드셨어요?”
“우체국 일 봤다며요. 고생했네요.”
잠깐의 인사와 웃음 속에서
낯선 사람도 섬에서는 곧 익숙해진다.

저녁이 되면, 자연스럽게 전화기를 든다.
육지보다 늦게 해가 지는 이곳에서 부모님과의 통화는 하루의 마무리이자 안부의 의식이다.
“아버지, 오늘은 좀 어떠셨어요?”
“할머니는 식사는 하셨어요? 허리 아프다는 말씀은 안 하시죠?”
자잘한 질문들로 마음을 전하고 나면, 잠시 말없이 창밖을 본다.
그때쯤 불쑥 지인에게서 전화가 온다.

“형, 괜찮지? 그냥 생각나서.”
그 한마디에 외로움이 조금 사라진다.
울릉도의 바람도, 섬이라는 거리도 이런 연결 앞에서는 조금쯤 무력해진다.

쉬는 날이면, 행남산책로를 걷는다.
바다와 나란히 걷는 그 길은 생각을 정리하기 좋은 시간이다.
어느 날은 벤치에 앉아 책을 펼치고, 또 어떤 날은 가만히 수평선만 바라보기도 한다.
가끔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을 방 안에서 천천히 넘기며 하루를 보낸다.
영화를 한 편 보기도 하고, 무료함이 쌓이면 가벼운 배낭을 메고 성인봉에 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를 즈음, 눈 아래 펼쳐진 푸른 바다와 마을의 풍경이 피로를 덜어준다.
그곳에서 나는 또 조금 단단해진다.

누군가에겐 아주 평범한 하루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에선 모든 것이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특별하게 스며든다.
울릉도에서의 삶은 거창하지 않다.
그저 평범한 사람들의 소박한 일상이 이어질 뿐이다.
그러나 그 안에 아주 작고 단단한 특별함이 묻어난다.
섬은 늘 바람이 분다.
그 바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매일매일 배워가고 있다.
지금 이 삶이 정답은 아닐지 몰라도, 내게는 가장 솔직하고 선명한 하루들이다.

“그렇게, 바람에 익숙해질 무렵, 사람들 속에 다시 섞이기 시작했다.”


20170828_150410.jpg 행남산책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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