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도의 여름은 숨은 듯 다가온다.
누군가의 방문으로, 누군가의 뒷모습으로.
계절은 섬의 바깥보다 조금 느리게, 그러나 더 진하게 스며든다.
어느 날 저녁 ‘바오로 형님’하며 전화가 온다. 이번 주 울릉도 교육 들어갑니다. 봅시다.
반가운 이의 전화다. 흔쾌히 들어오는 녀석을 반길 수밖에 그렇게 며칠뒤 후배와 마주 앉았다.
인연은 또 다른 인연을 만드는 법 울릉에서 사회복지직 공무원으로 일하는 후배를 소개해주어 함께 자리를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부딪히고, 적응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들이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울릉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독도새우 접시 위로 소주잔이 돌고, 육지에서 가져온 말투와 시선들이 오고 간다.
“형, 살 맛 납니까?. 형은 미쳤어요. 육지생활 좋은 자리 접어두고 여기까지 들어와 있는 거 보면, 그래 살아보니 좋던가? 어떤 맛인가요?” 호기심의 질문이 마구 쏟아진다.
묻는 이의 눈빛엔 호기심과 의심이 엇갈려 있었다.
나는 잔을 들었다. 가볍게 웃었지만, 금세 말문이 막혔다.
‘맛’이라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바람 향, 파도 소리,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낮은 건물들, 그리고 이따금 찾아드는 외로움.
그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을까.
그래서 나는 오히려 그에게 되물었다.
“너한텐, 도시의 삶은 어떤 맛이야?”
그렇게 돼 물으며 나는 웃었다. 섬은 그렇게, 사람의 감각을 조금씩 바꿔놓는다.
조미료 없어도 진하게 우러난 국물처럼. 처음엔 심심한데, 오래 끓이면 깊어진다.
아마 나도 지금 그런 국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일까.
광복절 연휴가 다가오던 어느 날, 고향의 친구이자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 울릉 간다.” 기다려라
바쁜 와중에도 다른 일정으로 들어오지만 시간을 내어 나를 만나기 위해 온다는 것.
사동항에서 만난 그는 어린 시절 함께 동네 골목길을 뛰어놀던 뚱뚱한 형이 아니었다. 세월의 흐름에 순응한 외모 머리칼이 줄어들고 희어졌고, 술상 앞의 오고 가는 이야기에서 피어나는 웃음은 여전했다.
우린 사소한 것을 이야기하며 길을 걸었다. 예전 같으면 수다스러웠겠지만, 이젠 침묵도 괜찮았다. 짧은 침묵 속에서 형이 불쑥 말을 한다.
“형 동생을 떠나 너는 벗이다.”
나는 가만히 그 말을 되새겼다.
나이의 위계도, 인생의 선·후배사이도 허물어버린 한마디.
벗.
어쩌면 이 섬에 와서야 그런 단어가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벗이란, 말없이 곁에 있는 사람. 한동안 보지 않아도 그 시간이 허물이 되지 않는 사람.
그날 밤, 술잔을 기울이며 그는 내게 울릉도에 대해 물었다.
나는 파도가 좋고 바람이 좋다. 천천히 흐르는 시간의 흐름, 그리고 그 안에서 쫓김이 없는 삶이 좋다고...
이 섬은 대답보다 풍경이 먼저 말을 건넨다.
그날의 저녁노을은 유난히 붉었다.
모래 위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위로가 되던 순간이었다.
짧은 방문을 마치고 떠나는 사람을 배웅하는 일은 여전히 서툴다.
항구는 언제나 바쁘고, 어쩐지 내 마음은 침묵으로 배웅한다.
섬에 머무는 이와 섬을 떠나는 이 사이엔 어쩔 수 없이 거리감이 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남겨진 자는 침묵을 껴안고 살아야 한다.
배에 올라탄 지인이 손을 흔든다.
나도 손을 흔든다. 하지만 그 안에는 ‘잘 가’보다 ‘잘 살아라’라는 말처럼 들린다.
그들이 이 섬에서 잠시나마 무언가를 얻고 갔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들이 남긴 발자국 위에, 다시 나의 하루를 덮어 갈 것이다.
나는 사회복지사였다. 아니 사회복지사이다.
그렇게 만나고 쌓인 인연들이, 먼 곳에서도 여전히 응원하고 힘을 실어준다.
그 마음들이 이 섬에서의 나를 더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일로서가 아니라 마음으로 사람을 돌보고, 정보보다 표정으로 이웃의 안부를 묻는다.
이곳에선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하루를 살아낸다.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는 말을 건네고,
누군가의 손짓을 먼저 알아보며,
조용히, 그러나 꾸준히 이 섬의 삶에 스며든다.
그렇게 오늘도 또 한 사람의 안부를 가슴에 품고,
나는 천천히, 그러나 멀리 가는 바람처럼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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