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것에서 피어나는 뿌듯함
울릉도에서 나의 하루는 바닷바람과 파도 소리를 벗 삼아 시작된다.
동쪽에 자리한 섬이라 그런지 아침 햇살도 더 일찍, 더 선명하게 창을 넘어 스며든다.
출근길에 마주하는 짙푸른 바다와 부서지는 파도 소리에 마음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도시의 출근길과는 전혀 다른, 자연과 함께 숨 쉬는 하루의 시작이다.
이곳의 시간은 느긋하지만, 그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리듬과 무게가 있다.
일은 단지 생계를 위한 수단을 넘어서, 내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동료들과 함께 땀을 흘리며 현장을 돌고, 잠시 짬을 내어 나누는 따뜻한 한 끼 식사는 단순한 노동을 넘어 함께하는 시간이다.
서로의 고단함을 이해하고, 묵묵히 함께 해내는 과정 속에서 ‘일’은 점차 ‘삶’으로 녹아든다.
내가 맡은 일은 어쩌면 사소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일이 섬의 쾌적함을 유지하고, 누군가의 일상이 편안할 수 있도록 만드는 데 꼭 필요한 역할이라는 걸 안다.
그걸 깨달았을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뿌듯함이 자라기 시작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모든 게 낯설고 서툴렀다. 실수도 잦았고, 매일이 하나의 숙제 같았다.
하지만 그 숙제들을 하나하나 풀어갈수록,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작은 성취 하나가 다음을 향한 용기를 만들고, 그 용기들이 쌓여 어느 순간 ‘나, 이 섬에서 제법 잘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이어졌다.
일이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여정이 되고 있다.
섬이라는 낯선 땅에서 시작한 일상이 이제는 어느새, 나의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뿌리가 되어가고 있다.
비록 도시에 있던 시절보다 더 크고 화려한 무언가는 없지만, 이곳에서는 아주 작은 일이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한 의미로 다가온다.
때로는 땀을 흘린 하루 끝에 저녁노을을 바라보며,
‘내가 이만큼 해냈구나’ 하는 감정이 조용히 밀려온다.
그럴 때면 문득 궁금해진다.
내일은 또 어떤 작은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일들 속에는 늘 ‘사람들’이 함께 있다.
처음엔 그저 ‘같이 일하는 동료’였던 사람들이, 어느새 친구가 되고 형이 되고 동생이 되었다.
삶의 방향은 달라도 하루의 무게를 공유하는 이들과는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어떤 온기가 생긴다.
어떤 날은 함께 근무가 아닌 형 동생들과 방파제에 바닥에 둘러앉아, 차에 싣고 온 식탁과 고기 그리고 조용히 바다를 보며 쓰디쓴 소주 한 잔을 나눈다.
잔칫집은 아니지만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곳에서 떠들썩한 잔치가 벌어진다.
도시 살다 온 너는 뭐 하러 여기 들어왔는지. 혼자 와서 외로울 텐데 등등 시시콜콜 일상의 대화들이 오고 간다.
그리고 취기가 조금씩 올라오면 지는 해를 보며 말없이 건네는 그 잔 속엔, 서로를 향한 수고와 위로, 그리고 이 섬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만의 깊은 정이 담겨 있다.
그리고 대부분 도시 생활을 경험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사람들, 도시의 화려함보다 여유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 그 누구 하나 도시의 화려한 불빛을 말하지 않는다.
그보단 오늘 고생 많았다고, 내일도 즐겨보자고,
그리고 시원한 바닷바람, 일렁이는 파도 소리가 소박한 술상의 분위기를 한층 올려준다.
‘술맛 참 좋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이 섬의 일원이 되어간다.
바닷가에 쌓인 방파제처럼, 서로에게 기대며, 바람과 파도를 함께 맞서 본다.
그리고 바쁜 날들 사이, 가끔 찾아오는 쉼의 시간이 있다.
쉬는 날, 나는 평소에도 즐기던 책을 보기 위해 울릉도 도서관에 갔다.
주민등록증을 내밀자. “육지에서 오셨네요.”라고 인사를 하면 묻는다. “예, 육지에서 울릉도 살려고 들어왔어요.” 자신 있게 대답하고 회원 가입을 마치자, 직원분이 환한 미소와 함께 도서관 가방을 건넸다. 필요하면 가져가라고 생각보다 마음이 설렜다.
섬에서 처음 받은 나만의 물건 같았다. 그 가방엔 이제 내가 골라 담을 책들과 내 생각을 담은 글, 그리고 조용한 시간들이 채워질 예정이다.
도서관 2층 열람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책장을 넘기는 순간, 마치 도시에서 한참 잊고 있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바람은 창문 너머로 들어오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는다.
나의 책 읽기는 답답한 건물에 갇혀 읽는 것이 아니었다. 사색하기 좋은 환경은 어디라도 책 읽기 좋은 환경이었다. 해안 산책로 벤치, 독도박물관 전망대, 옛 울릉군수 관사 편백나무 아래 그늘 소풍 가듯 편의점 샌드위치 하나, 사이다 하나가 함께 했었다. 그렇게 책과 함께 마무리하는 하루는 내가 이곳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조용한 사치였다.
그렇게 섬에서의 쉼도,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주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색다른 쉼이 찾아왔다. 육지로의 여행...
육지에서 섬이나 오지로의 여행이 아니라 섬 주민으로 육지로의 여행이다.
모처럼 얻은 연휴.
멀리, 육지로 나가는 배표를 예매했다. 출항 전날 밤, 가방을 싸면서도 육지에 가면 챙겨야 할 것들 특히 포항에 세워둔 자가용도 함께 들어와야 해서 화물선에 차를 싣고 오는 것부터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니 밤이 깊었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섬을 떠나 바깥세상으로 나간다는 설렘, 일상이었던 육지 생활이 이제는 여행으로 바뀐 지금의 상황이 어색하기도 하면서 뭔가 색다른 경험처럼 다가왔다.
그렇게 새벽 바닷바람을 창으로 받으며 잠이 든다.
내일이 육지는 어떤 느낌일까...
지금 이 설렘은, 마치 오래된 책갈피를 다시 펼치는 느낌이지 않을까?
다음 페이지는 어떤 이야기들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