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
우리 몸을 구성하는 100조 개의 세포 중 단 1개의 세포에 들어 있는 유전자 정보코드의 내용을 풀어서 책으로 쓰면 아파트 5층 높이의 분량이라고 한다. 각 사람의 유전자 정보코드, 즉 DNA 설계도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분명하신 계획과 의도가 존재한다는 것. 전 세계 각 사람 모두가 지니는 독특한 특성들이 그대로 후대에 유전되는 놀라운 사실은 DNA의 자기 복제에서 기인한다.
DAN는 자기 복제를 한다. DNA의 이러한 특성은 그 후손에게 같은 형질을 물려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웬만한 충격에도 깨지지 않는 단단한 핵 안에 있는 DNA가 자기 복제를 어떻게 할 수 있을까? DNA는 RNA를 만든다. DNA가 RNA로 전사하는 이유는 세포 안의 핵, 즉 단단한 껍질 안에 있는 각 사람 고유의 유전자 정보는 파괴되면 안 되는 것이기 때문에 DNA가 전사된 RNA가 DNA 정보를 그대로 복사해서 세포 내로 나와서 단백질을 만든다.
복 중에서 서로 싸우는 이들의 앞날은 이미 하나님께서 정하셨다.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신 그 말씀 그대로 되었다.
이삭의 나이 육십 세에 낳은 두 아들은 달랐다. 맏아들에서는 사냥꾼, 동생 야곱은 장막에 거하는 종용한 사람이었다. 족장시대의 아비 입장에서는 에서가 남자답고 믿음직스러웠을 수 있으나, 여호와의 말씀을 마음에 둔 리브가는 야곱을 사랑하였다. 두 아들이 다투면, 아빠 이삭은 에서 편 엄마는 야곱 편을 들었을 것 같다.
장자의 명분을 판 그때에도 에서는 야곱과 달랐다. 사냥을 다녀와 허기가 지자 야곱이 쑤어 놓은 팥죽을 달라고 하였다. 당시에 부유한 족장의 아들이 사냥을 나가지 않고, 솥단지 앞에서 죽을 쑤다니 이것만 보아도 야곱의 성품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야곱은 에서가 창세기 27장 36절에서 말씀하신로 에서를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갈취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25장 34절에서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 었더라’고 말씀하셨듯이 에서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대를 잇는 언약의 자손의 장자로서의 역할에 관심이 없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대대로 이어가야 할 장자의 역할보다 당장 눈에 보이는 배고픔을 해결해 줄 육신의 팥죽이 더 중요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난 삼아 팔아버린 장자의 명분만 경홀히 여긴 것이 아니었다. 창세기 26장 34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에서는 이방의 여인과 혼인을 했다. 아브라함은 본토 친척 아비의 땅을 떠나 이방 땅에 살면서도 100세에 얻은 이삭을 우상숭배를 일삼는 이방의 여인과 혼인시키지 않았다. 종을 보내어 본토 친척인 리브가를 데려와 이삭과 혼인시켰고, 그 둘은 사랑했고 아브라함과 사라를 이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갔다.
내 짐작건대 이삭은 두 아들에게 아비가 어미를 어떻게 만났는지,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왜 살던 땅을 떠나게 되었는지, 아브라함이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지,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약속의 자녀로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약속한 땅을 후손이 차지하기 위해 믿음의 계보를 이어가야 한다고 수차례 들었을 텐데도 에서는 이방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 결혼은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를 근심시켰다.
그 둘은 맏아들 에서의 결혼을 분명, 반대했을 것이다. 이삭과 리브가는 그들의 만남이 여호와의 계획과 이끄심이었음을 확신했을 텐데 맏아들이 이방 땅의 여인과 혼인을 하겠다는데 찬성했을 리가 없다.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 거라 만류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가 혼인을 한 이유는 에서가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고 순종치 않았기 때문이다.
거부가 된 이삭이 아비 아브라함 때로부터 이루어 놓은 하나님의 축복을 과연 이방 여인과 혼인한 에서, ㄱ리고 이방인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었을까?
원치 않았다. 이삭과 리브가가 원치 않았던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셨던 것이다. 믿음으로 본을 보여준 아브라함을 하나님은 사랑하셨고 그의 자손에게 축복을 약속하셨는데,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경시 여긴 에서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방인 후손들에게 축복주시기를 원치 않으셨다. 그 약속은 한 두 대에서 끝나는 약속이 아니라 천대를 이어 지금의 우리에게도 주실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었기 때문에 절대 잊혀서는 안 될 약속이었기 때문이었다.
장자의 명분을 팔고, 이방여인과 혼인한 에서는 타고난 성품대로 타고난 그릇대로 하나님께서 그 DNA에 새긴 정보대로 살았다.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 해도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기회를 주신다. 인간에게 이성을 주셨고, 모든 상황 속에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러나 그는 항상 하나님의 계획과 관계없는 선택을 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이 탐이 났다. 팥죽 한 그릇에 거래한 그 명분이 에서에게 장난처럼 여겨졌겠지만 야곱은 ‘이제 내가 장자의 명분을 가졌다’ 믿었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삭이 눈과 귀가 어두워 유언을 남기고자 장자에게 축복하고자 한 그날도, 야곱의 의지로 아비 이삭을 속인 것이 아니다. 에서에게 장자의 축복이 전해질 그 순간, 하나님께서 ‘리브가’를 통해 일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에서가 장자의 축복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하나님을 통해 그 마음이 동요된 리브가는 비겁한 방법이었지만 이삭으로부터 장자의 축복이 에서가 아니라 야곱에게 주어지게 하는 데 성공했다. 그 팥죽 한 그릇의 결과가 이렇게 될 줄 몰랐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쫓겨간 야곱의 삶은 고단했지만 이를 통해 하나님은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계셨다.
분이 난 에서는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축복하고 밧단아람으로 보내 그의 아내를 맞이하라 당부했고, 야곱은 그 명을 따라 그곳으로 떠났다. 장자의 축복을 받은 동생은 멀리 떠났는데 또 가만 보니, 가나안 사람의 딸들이 그의 아버지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했다. 이러다가는 동생이 빼앗아간 장자의 축복은 돌아올 것 같지 않고, 자신의 아내와 자녀들도 최소한 자식으로서 이삭을 기쁘게 하지 못하니 자신의 안위가 심히 걱정이 되었던 것이었을까? 그러다 묘책을 낸 게 이삭의 14살 위의 이복형 이스마엘을 찾아가 이스마엘의 딸과 혼인을 하는 것이었다. 왜 하필이면 또 그런 선택을 했을까? 서자였지만 아브라함의 장자였던 이스마엘의 후손이라도 되어야 이삭의 축복을 받은 야곱의 위에 있을 수 있다는 얄팍한 계책이었을까?
분명히, 이스마엘과의 관계가 어떠했다는 것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지난날 왜 이스마엘이 어미 하갈과 쫓겨났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는 더욱 이삭과 이스마엘이 서로 왕래를 하며 지냈을 것 같지 않다. 이스마엘은 여종 하갈의 자식으로 아브라함 86세에 얻은 아들이지만 사라에게서 나온 약속의 자녀, 장자가 아니었다. 이스마엘은 어미 하갈과 쫓겨나 광야에서 죽을 뻔했다. 에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다. 이스마엘에게 가서 그 땅에서 또 이방의 여인들과 혼인을 했을 텐데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판단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이로서 어긋난 선택을 했던 에서. 그의 DNA와 그 DNA를 이어받은 후손은 애석하게도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상반된 길을 걸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관계없는 이의 DNA를 물려받은 것이 에서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각 사람마다 주신 DNA에 기록된 유전자 정보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의미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뜻. 성품, 외모, 취향, 자라나는 환경, 지적 수준, 학문적 교육, 부모에게로부터 받은 신앙교육 등 많은 정보가 그 사람의 삶을 만들고 그 삶이 결국 주님을 향하고 있는지 멸망을 향하고 있는지는 어차피 하나님의 계획하심이다. 그러나 오늘도 모든 사람에게는 평등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와 이성으로 하나님 뜻을 아는 약속의 자녀로 살아갈 기회는 동등하다는 것을 잊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