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 때의 겨울은 우리 세 여자가 제일 좋아하는 시기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제법 겨울 냄새가 나는 추운 날씨. 붕어빵과 편의점 컵라면 맛의 극대화를 느낄 수 있는 시기. 이 시기의 시작은 첫눈으로 시작되지만
폭설은 조금 불편했다.
40cm 습설.
어제 첫 눈이 내렸다. 포슬포슬 하얀 눈발이 날리고 살포시 내려앉은 눈을 뽀드득 즈려 밟아 하얀 눈 밭에 발자욱을 남기는 낭만적인 장면따위는 없었다. 어제 오전 내내 흐린 날씨에 우박이 퍼붓더니 오후에 거센 눈으로 바뀌었다. 함박눈이 내려 제법 쌓인다 싶었는데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고 내렸다. 한 시간정도 일찍 퇴근길에 나섰다. 길은 이미 겉잡을 수 없는 형태로 변질되고 말았다. 눈의 상태가 습기를 많이 머금고 있다 보니 쌓인 눈은 묵직하여 차 바퀴가 빠지기 쉬웠고 곳곳은 미끄러진 차들과 눈에 빠져 오도가도 못하는 차들로 뒤엉켰다. 꼼짝도 하지 않은 체 서 있는 시간이 20여분. 길은 초토화되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들 걱정에 전화를 몇 통을 했지만 받지를 않았다. 핸들은 제 맘대로 돌았다. 운전에 꽤 구력이 생겼다 하여도 천재지변 앞에서는 가슴 졸이기 마련이다. 내려 놓음이 잘 안 되는 핸들링으로 간신히 집에 왔다. 살아 온 것만해도 다행이다 싶었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집에 오자마자 아이들 저녁밥부터 챙겨주었다. 쉬지 못하고 콩이 튀듯 팥이 튀듯. 학원을 가지 않아 평상시보다 일찍 집에 왔을 큰 아이가 엄마의 형편을 조금 알아 주기를 바랐을까. 괜시리 큰 아이에게 짜증을 냈다.
"왜이렇게 전화를 받지 않아. 이럴 때 밥이라도 해 놓으면 좀 좋아?"
전화도 받지 않았고 엄마의 이런 애씀과 생존을 알턱이 없겠지만 밥상에 얼른 대들어 나의 수고로움을 조금 덜어주지 않냐 푸념을 했다. 큰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밥을 꾸역꾸역 먹었다.
어제에 이어 오늘.
새벽 6시반에 출근 길에 나섰다. 미쳤다고 해야하나. 눈이 아직도 오다니.
목숨을 걸고 출근을 해야하나 싶었다. 무슨 대기업 중책도 아니고 몇 백만원을 버는 것도 아니고 겨우 200만원 사무보조직 주제에 왜 이리 성실함과 근면한 성격이 거추장스러운지. 아줌마가 딱히 중요한 일을 하는 보직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새벽에 운전대를 잡고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눈발이 빗발과 같이 쏟아지는 폭풍을 해치고 두시간만에 간신히 도착. 더욱 큰 난관은 주차였다. 회사 앞은 눈이 가득했다. 사장님이 삽하나로 눈을 치우고 있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주차를 간신히 했다. 겨우 세 명의 직원들이 도착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집에 다시 가란다. 에잇!
날 살려라 하고 혹여나 또 막힐까 싶어 집에 얼른 왔다. 진작에 휴교령이 내린 막둥이는 느즈막히 일어나 여유있는 식사를 하시고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속옷 바람으로 간만에 꿀같은 보너스를 제대로 즐기고 있었다. 반면 올해 여름 폭우때와 마찬가지로 휴교와 등교시간을 늦추는걸 어정쩡하게 결정을 하지 못했던 큰 아이 학교는 이번에도 같은 실수를 했다. 폭설 때도 휴교를 결정하지 못하고 아이들을 등교시켰다. 몹쓸 교장.
"아니, 언니는 언제 온다니? 학교를 이런 날에 오라고 하면 어떡하냐. 걸어오면 안되는데 전화라도 하지. 걱정이다."
막둥이는 요새 크려는지 나를 볼때마다 배가 고프단다. 집에 도착해서 부랴부랴 집안 일을 하고 밥을 했다. 내가 지 언니 걱정을 하는데도 밥만 열심히 먹는다. 바로 그때,
"엄마! 언니가 왔어."
문이 열렸다. 옷이 푹 젖어 있었다. 큰 아이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엄마! 발이 너무 시려워."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큰 아이를 보자마자 젖은 양말을 벗기고 드라이기를 켜서 발을 데워주었다. 손도 발도 차디찼다.
큰 아이는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30분동안 걸으며 학교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런데 학생도 선생님도 과반수 이상이 등교를 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학교에서는 12시까지 등교한 아이들을 잡아 두었다. 선생님들이 오지 못하는 상황에 학생이 자리에 앉아 있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결국 학교에서는 영화를 보여주며 시간을 떼우다가 하교조치를 내렸다. 뒤늦게 다섯시간만에 도착한 선생님은 쌍욕을 했다나 어쨌다나.
큰 아이는 눈길을 오고가며 전화 한통 하지 않았다. 대견했다. 그 힘든 길을 오롯이 혼자 이겨냈다. 이 못난 어미처럼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냐고 원망도 하지 않았다. 젖은 양말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눈에 절여진 운동화를 신고 나를 보자마자 눈물이 터졌다. 무서웠고 넘어졌고 다시 일어서서 홀로 걸은 길. 아이는 벌써 삶이 혼자라는 사실을 깨달았을까. 큰 아이는 힘듦을 말하지 않았다. 몸이 녹고, 밥을 먹었고, 세시간을 내리 잤다. 그리고는 일어나서 학원을 다녀왔다.
"엄마! 나 단게 먹고 싶은데 같이 편의점 갈까?"
"그래!"
큰 아이는 나한테 편의점에서 초콜릿을 사주었다. 2+1 하는 자그마한 가나 초콜릿을 집으니 그 옆에 있는 3200원짜리 비싼 초콜릿을 집어 들고는 계산을 하는 것이었다.
어린 아이가 커버려 아쉬운 건 나다. 사춘기니 뭐니 하며 아이를 편견으로 몰아세우는 것도 나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잘 자라고 있는 걸 보지 못하는 것도 나다. 아이는 나를 다 보고 있는데 말이다....
'미안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