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 그 정도 입었으면 샀어야지."
오랜만에 밭일을 가지 않았다.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제천에 시댁의 땅이 있다. 제작년 아버님께서 돌아가신 이후로는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홀로 밭에 가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리하여 어머님 대신 남편과 내가 밭 작물을 돌보느라 요즘 주말도 없었다. 땅에 심기운 풀도 생명이라고 열매가 나는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았고, 몸이 피곤해도 주인 발걸음 소리 듣고 자란다는 말에 매일은 아니더라도 매주 가보았다. 지난주는 어머님께서 심어 놓으신 팥을 거두어 널어 놓고, 양파와 마늘을 심고, 3년차 된 땅두릅의 가지를 서리가 내리기 전에 바짝 베어주어야 했다. 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게 농사일이지만 값비싼 노동과 시간투자대비 티도 나지 않는 일 또한 농사이기도 하다. 그래도 올해는 솔찮게 수확물이 제법 있고, 매번 잡초나 베며 비생산적인 일에 시간을 쏟던 초보농사꾼인 우리 부부가 장족의 발전을 해서 뭐라도 심고 거두었던 의미 있는 해였다. 아무튼 지난 주 욕심껏 마늘과 양파를 심느라 축이난 몸 때문에 이번 주말은 쉬게 되었다. 대신 아이들 월동 준비 차 겨울 옷을 사주려고 쇼핑에 나서게 되었다.
옷도 대범하게 사는 둘째 녀석과는 달리 원체 까탈스러운 취향을 가진 첫째 녀석 때문에 오늘 쇼핑도 난관이 예상되었다. 큰 녀석은 이미 사고 싶은 옷을 정해 놓은 모양이었다. 정학히는 아니더라도 대충 어떤 스타일의 어느 색의 옷을 사야지 마음에 내심 결정을 하고 쇼핑을 하니 눈에 들어오는 옷마다 제 계획에 맞지 않는 모양이었다. 수백 가지 아니 수천가지 옷을 보았다. 두 어시간이 지났고 1층부터 5층까지의 거대한 쇼핑몰을 두 퀴나 돌았고 영캐주얼이 있는 층은 벌써 세바퀴나 돌았다. 이쯤 되니 둘째 녀석은 슬슬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전날 독감예방 접종을 맞고 몸이 좋지 않은 막둥이가 힘든 모양이었다.
”안되겠다. 니꺼라도 얼른 사자.“
나는 이대로 쇼핑을 끝낼 수 없다는 조바심에 뭐라도 집어 가려고 마침 지나고 있던 이벤트 코너의 매대를 뒤지기 시작했다. 쇼핑 내내 제 마음에 드는 옷을 찾겠다고 열의를 내던 첫째와는 달리 둘째는 언제나 말이 없고 묵묵히 언니를 따라다니기만 했다. 손에 걸리는 기모가 많이 들어간 톡톡한 후드티셔츠와 라운드티셔츠 두벌을 둘째 녀석의 몸에 대충 둘러보고는 바로 샀다. 1분도 걸리지 않았다.
”입어볼래?“
”아니. 괜찮아. 맞아. 커도 그냥 입으면 돼.“
”색깔은?“
”난 초록색 예뻐.“
결재까지 3분정도 걸렸나. 동생 옷을 후다닥 사는 것을 본 첫째는 조급한 눈치였다. 샘이 났던 모양이다.
”엄마! 나 거기. 엄마가 옷 예쁘다고 했던 곳에 가볼래.“
”그래! 거기 후드티셔츠 예뻤어. 얼른 가보자.“
세바퀴즘 돌다가 비싸지 않은 가격의 자수로고가 박힌 기모 후드티셔츠를 보았던 곳을 찾아 갔다. 옷 선택에 있어 중요한 기준은 취향이지만 가격도 무시할 수 없다. 아이들이 어른 만치 커지니 옷도 싼 옷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 제 보기에 좋은 것을 고르니 가격도 예전과는 천지차이가 났다. 엄마 입장에 내 옷은 좋은 걸 못 사도 아이들한테는 좋은 옷에 브랜드까지 찾으니 주머니 사정은 욕구에 비해 늘 버거웠다. 눈여겨 봐 두었던 그 옷은 합리적인 가격이었고, 때 안타는 회색이었고 자수로고는 덤으로 노란색 부클이 였다. 색깔이 무난하기도 했지만 노란색 부클이 로고가 화사해보였다.
아뿔사. 마음에 들었던 그 후드티셔츠를 누군가가 입어보고 있었다. 세일 중이었던 그 옷이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같은 제품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직원에게 손짓을 했다.
”저거요. 저기 저 아저씨 입어 보는 옷. 또 없어요?“
”다른 색깔은 있어요. 저 옷이 마지막인데 라지사이즈에요.“
”어떡해.“
마음이 불안한 찰나. 저 아저씨 그 옷이 마음에 안드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조금 작은 것 같았는데 다행이었다. 벗어 놓은 옷을 잽싸게 가져다가 딸에게 입어보라고 했다.
”어떤 것 같아?“
”엄마 눈에는 괜찮은데. 라지라고 해도 교복 위에 입으면 별로 커보이지 않아. 그리고 후드티는 조금 넉넉하게 입어도 괜찮아.“
딱 봐도 거절이란 걸 못할 것 같은 직원이 눈치를 보다가 사이즈가 없는 것에 미안함을 느꼈는지 다른 색깔 미디움 사이즈를 가져왔다. 이번에는 회색이 아니라 검은색을 입어 보았다.
”어떤 것 같아?“
”음...........“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색 없어요?“
딸은 남색을 찾았다. 평상시 밝고 환한 남색에 빨간 자수 로고가 들어간 후드티가 입고 싶다던 녀석이 그 많고 많은 옷 중에 꼭 그걸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미련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1층부터 5층을 계속 돌고 돌았다. 아유 속 터져.
”남색 드려 볼까요?“
참 친절한 청년이었다. 나는 그 친절한 청년의 서비스 정신을 아주 높이 샀다. 딸은 또 남색을 입었다. 색이 조금 칙칙한 남색빛이었지만 그래도 타협할만하다 생각했다. 회색에서 검은색 그리고 남색. 사이즈를 찾아 준다고 창고에서 재고 박스를 여러개 나르는 것을 보았다. 식은 땀에 났다. 웬만해서 이곳에서 끝장을 내자.
”넌 어떤 게 좋으니?“
거울 앞에 뾰루퉁하게 서 있는 딸의 얼굴을 보자니 버리고 나오고 싶었다. 동시에 내 눈에 들어 왔던 청년 직원의 아련한 눈빛. 그냥 이 난감한 상황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옆에서 긴 한 숨을 내 쉰 막둥이. 대답을 하지 못한 체 나에게 애써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이고 있는 큰 녀석을 위해 친절한 그 직원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다는 양심의 소리에 질끈 눈 감았다.
”죄송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요.“
둘째는 저만치 멀어져 가고 있었다. 속에서 불이 난 나와는 달리 첫째는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사서 안 입는 것보다 이 불편한 마음이 더 나아. 그렇지만 그 분한테 정말 미안한데..... 복 많이 받으세요. “
엄마가 억지로 떠 안겨 주는 옷을 억지로라도 입었던 초등학생은 이제 없다. 속에서 화가 솟구쳤지만, 내심 기특하기도 했다. 이제 제법 컸다고 제 마음에 드는 옷을 선택할 줄도 알고 합리적인 소비를 위해 버려야 하는 허영심과 상술에 넘어가지 않는 곤조도 마음에 들었다.
”우리 딸 많이 컸네. 거절할 줄도 알고. 잘 했어. 그 직원 분 복 받을 거야.“
더 이상 옷을 사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수고롭게 이 옷이 딸에게 어울릴까 저 옷을 좋아할까 안입으면 어쩌지 하는 전전긍긍은 이제 굿바이. 자식 녀석을 위한 고된 노동에 비해 결과물이 늘 천대 받았던 쇼핑은 정말 끝이 났다. 딸의 옷장에 쳐 박힌 옷들이 나의 옷장으로 스멀스멀 들어와 길이가 어정쩡한 옷들을 울며 겨자먹기로 돈 아깝다며 몸에 우겨 넣던 날들도 이제는 그만.
이제 나는 나를 위한 쇼핑을 해야겠다. 생각만해도 신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