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사정’이라는 서글픈 핑계
분노를 다스리는 일은,
냉철한 내 남편의 말에 따르면
의외로 쉽고 간단합니다.
“화를 내봤자 상황을 바꿀 수 없다면,
화를 낼 필요도 없다.”
간단명료한 이 진리가
비로소 오늘에서야
내 삶에 실현되었습니다.
물론 어느 날 갑자기 얻은 깨달음은 아닙니다.
수없이 불처럼 타올랐다가 결국 재만 남기고 사그라진 분노의 응어리 속에서,
그 숱한 시행착오 끝에 얻은 결론에 가깝습니다.
오늘 낮, 집 앞에서 강아지와 놀아주다 무심코 우편함 속 ‘Australian Government(호주정부)’라고 적힌 봉투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수신인은 남편이었습니다.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봉투를 뜯자, 운전 중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남편의 사진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습니다.
그 아래 적힌 숫자는 더욱 잔인했습니다.
벌점 4점, 그리고 벌금 $1,251.
“어라… 이상하네. 며칠 전에 벌금 냈는데….”
정확히 이틀 전, 짜증 섞인 손길로 재활용 쓰레기통에 처박아두었던 통지서를 다시 꺼내 비교해 보았습니다.
아뿔싸, 하필이면 다른 위반 건이 하나 더 날아온 것이었습니다.
가슴 깊은 곳, 아니 그보다 더 아래 단전에서부터 묵직한 분노가 포효하며 치밀어 오르던 찰나,
문득 남편이 했던 그 문장이 뇌리를 스쳤습니다.
“후…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지.”
나는 조용히 벌금 용지를 들고 화장실에 있던 남편에게 건넸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방으로 들어와 누웠습니다.
‘잠이나 자야겠다’ 생각했지만, 당연히 잠은 오지 않았습니다.
졸음보다 억울함이 조금 더 매서웠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그냥 넘어간다고? 보살이야?”
아마 누군가는 그렇게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마음이 넓은 대인배가 아닙니다.
누구보다 뜨겁게 분노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다만 이번에 화를 내지 않은 이유는, 불과 2주 전 똑같은 일로 이미 한 차례 전쟁을 치렀기 때문입니다.
그날 주차장에서 시작된 말다툼은 감정의 폭발로 이어졌고,
남편은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을 길바닥에 내던졌습니다.
운 나쁘게도 진입하던 차가 그 가방을 지그시 즈려밟고 지나갔지요.
가방 안에는 휴대전화가 들어 있었고,
그날 이후 우리 집에는 박살 난 휴대전화 수리비까지 더해진 심각한 재정난이 남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또다시 날아온 고액의 벌금이라니.
미쳐버릴 것 같았던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며 상황을 정리하다 보니, 마음이 조금씩 평온을 되찾습니다.
‘어차피 이 더운 호주 여름에 당신이 땀 뻘뻘 흘리며 뼈 빠지게 번 돈인데… 나보다 당신 속이 더 썩어 문드러지겠지.’
이렇게 생각하니 묘하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듭니다.
이런 감정을 흔히 ‘측은지심’이라 부르는 걸까요.
분노가 치밀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말해봅니다.
“저 사람에게도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겠지.”
한 발짝 물러서면 그제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나에게도 타인을 가여워할 줄 아는 ‘연민’이라는 근육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운전 중 과속으로 위험하게 추월하는 차를 보며
“저 사람, 급똥이 마려운가 보다”
라고 생각하면, 그 일은 더 이상 화낼 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각자의 사정.’
내가 참 좋아하는 말이자, 어쩌면 우리가 서로를 견디며 살아가게 하는 가장 인간적인 핑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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